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랄라 Jan 20. 2017

컨택트(Arrival)

시제 없는 시간 속을 유영하며 흐른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일생이라는 제한된 기간 속에서 시제없는 시간을 사는 행운.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머릿속에 배열할  수 있는 추억, 기억 같은 것처럼

시제 없는 삶을 살게 된다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지나고나면 사라져 버리는, 유한한 것이 아니라면.


어느 날 그들을 만나 언어와 물리적 장벽을  뛰어넘어 교감하고나자, 전개될 삶 전체를 알아버렸다. 삶의 시작과 끝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시간을 앞뒤로 유영하듯 흐르며 살게 되었다. 이제 삶의 모든 순간은 현재로 존재한다.

행복'했던' 시절을 잃은 대신, 지금의 다른 행복을얻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랑하는 이들과 교감하고 그 감정을 추억으로 저장하는 수단 '언어',

사랑하는 이들과 일생 속에서 함께 머무르는 '시간',

이 영화는 시간과 언어에 대한 이야기다. 미지의 존재와 조우하면서 인간의 삶 속에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구체적으로 찾는 과정을 그린다. 사람은 물리적 시간을 순서대로 흐르며 존재하고 그 서사과정의 의의와 의미를 언어라는 수단을 사용해 기억으로 저장한다. 기억은 시간 순서를 가지지만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기억이 시간을 초월해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언어이다.


"당신은 수학에 접근하듯이 언어를 대하지"

-이과 남자가 문과 여자에게-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E. Sapir & B. L. Whorf-


우리는 대부분의 순간 언어로 사랑에 빠진다. 언어는 우리가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교감 수단 중 하나이다. 언어를 수학처럼 이해하는 일이 마음에 와닿아서 사랑하기도 하고 주고받는 위로와 격려, 공감 등 교감의 상당부분도 언어 기반이다. 추억도 가치관도 언어로 공유한다. 줄곧 같이 있지 않았다면 공유할 수 없는, 자신이 살아온 삶을 머릿속에서 축약하고 결론내려 상대에게 전달하는 내내 사용되는 수단도 언어이고 사랑하는 사람을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 조차 언어를 사용한다.


영화 속 이안과 루이스가 주고받은 대화에 나오는 사이퍼 & 워프에 따르면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는 그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언어는 사고를 지배하고 상대에 대한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기들이 뇌에 저장된 수 많은 정보들을 저장했다가 마침내 작은 입술을 달싹여 첫 단어를 떼는 과정은 경이롭다. 일찍 떠나보낸 딸과의 추억 속 대화에서 보이는 수많은 사랑과 인생의 어휘들과, 아기를 가르치듯 '그들'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루이스의 모습에서 모성애라는 공통분모와 연결고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는 외모와, 시간의 제약이 없는 삶을 사는 그들, 앨봇과 코스텔로는 시제가 없는 언어를 사용한다. 이 또한 언어와 사고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명해준다.


내 이름은 이효리...아니 해나 거꾸로 읽어도 해나.

앞뒤가 똑같은 전화번호~1577�

 


"지구에 온 목적이 뭐지?"

소통 담당인 언어학자 루이스에게 주어진 소통 과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도 함께 풀어가야 하는, 절실한 호기심.


우리에게는 어느 웹툰의 명대사로 익숙한 질문(어느 대학 엠티 술자리, 병을 돌려 병 입구가 향하는 사람에게 질문을 하는 진실게임 중에 남자선배가 여자후배에게 던진 질문. 한 마디로 얘기하자면 너의 외모가 지구인의 그것과 달리 매우 특이하구나, 라는 뜻이다).




딸을 보낸 뒤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루이스는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건조하게 강의를 나갔다가 의문의 '그것'을 보게 되고, 의문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할 당사자로 지목되어 그 미지와 조우한다. 두려움 속에서 방호복과 벽을 사이에 두고 그들과 서로 다른 언어를 내뱉던 루이스는 사이를 가로지르는 물리적, 언어적 장벽을 하나씩 허물며 교감하고, 이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택하게 된다.

앞뒤로 흐르는 인생을 살게 된 계기의 시점-의문의 존재인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실마리를 찾던 과정 중-즈음 루이스는 과거 기억의 편린으로부터 현재의 수수께끼를 풀 단서들을 조각조각 불러온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를 하고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몸은 현재에 머무르더라도 사고와 추억, 생각을 통해 시시때때로 각자가 의미있는 시간 속에 가서 머무른다.


인생은 시간 순서대로 흐르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언어를 사용하여 기억과 사고를 저장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의식과 감정의 시간들은 루이스의 시간처럼 앞뒤 시제 없이 흐른다.


장벽없이 완벽한 교감을 하고 인생 속 시제의 앞뒤전후가 의미없어진 후,

루이스는 그녀가 딸에게 붙여준 이름

H-a-n-n-a-h 의 상징성처럼

앞을 통해 뒤를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끝을 알고 삶 전체를 알아버렸지만 행복'했던' 시절이라는 말을 잃은 대신 지금의 다른 행복을얻었다.


일찍이 신일숙은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서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의미를 갖는다' 라고 했는데, 이것은 삶의 전개를 모두 알고 난 사람이 서사 순서가 있는 삶을 사는 경우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루이스는 시간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모든 인생의 순간들에 동시에 존재한다.


삶의 시작과 끝, 두 점 사이에 놓여있는 그 모든 시간.


일생이라는 제한된 시간 속을 유영하듯 앞뒤로 흐르며 떠다닐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Sf 영화에서 절정보다 초반을 훨씬 중요시 하는데, 초반 '그것'과 '그들'이, 언급만 되고 모습을 관객에게 보이기 전까지의 사운드와 대사, 분위기조성이 특히 참 좋았다.

이 영화에 몰입도가 컸던 이유는 "미지의 세계에서 무언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왔다"라는 사실을 제외한 모든 것은 정말 지나치게 현실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그 상정된 가상의 상황 속에 고스란히 들어가 상황에 대처하고, 그 미지를 조우하고 있는 기분.




-

덧.


_

이 와중에 이과 남자는 사건발생 직후부터 끝까지...아니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일생 내내

작업질 모드이다..

"결혼했어요?" (여자가 쓰러지는 와중에 한 말)

"제가 요즘 진짜 경이로운 건 따로 있어요. 하늘보다 경이로운 건...바로 당신을 만났다는 것"

그러고보니 처음 만난 순간부터 작업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언제봤다고 굉장히 친밀하게 다가왔다. 동시에 존재하는 일생의 거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하고 있으니 당연하다.


금방이라도 활을 쏠 것만 같은......이안.



-

'콘택트(1997)'라는, 조디 포스터와 매튜 매커너히 주연의 동명 SF영화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스태디 샐러인 '코스모스'의 저자로 익숙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의 과학 저서 중 유일한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작품이다. 어린 시절 기억에 가장 아름답던 SF영화이자, 내가 사는 세상 밖 우주나 미지의 세계에 대해 꿈과 호기심을 품기 시작한 계기 급의 영화였다. 이 동명의 영화와 컨택트(Arrival)는 많이 다른 듯 닮은 듯, 비슷한 느낌의 아련한 느낌.


요즘 세상에 함부로 마니아라는 말 쓰기엔 모든 방면에 너무 쪼렙이라 조심스럽지만 나름으로는 SF 마니아라서 "아직 안 본" 좀 재미있는 SF영화가 있을 때마다 대발견을 한 기분으로 행복해지는데, 연초부터 이런 아름다운 SF 영화를 본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아직 2017년 3주차지만 2017년에 본 영화 중 최고. 원작소설도 준비해두었는데 읽고나면 적고 싶은 말이 조금 더 생기려나.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3년 전작 '프리즈너스' 리뷰

"단죄의 주체가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없는 지옥 속의 아버지"

https://brunch.co.kr/@hikary0512/31



-

브런치 작가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시사회 관람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좋은 영화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 your name., 2016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