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정한다(Denial, 2017)

슬픔 정도로 끝나지 못할 일

by 랄라

나는 부정한다

(Denial,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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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슬픔 정도로 끝날 일이야?"

지난 일이라고, 지겹다고, 사과했으니 옛일이라고 넘어갈 수 없는 비극은 분명 존재하고, 그 비극을 초래한 것은 대부분 사람, 집단이다. 잘못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의견의 다양성'이라는 허울좋은 꾸밈을 하고 있지만 용납될 수 없는, 절대적으로 틀린 명제는 생각보다 세상에 많이 있고 일상을 사는 우리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에서든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 정도의 명제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지만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반면 대선토론에서 떠오른 이슈, '모든 인간은 각자의 성 정체성은 존중 받아야 한다' 정도의 명제는 아직까지 모두의 절대적 동의를 얻지 못하는 명제다. 인간이 인종, 종교, 사상, 성 정체성,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 때문에 차등적 대우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누군가의 찬성과 반대가 가능한 명제가 아니다. 사람이 어떤 인간과 집단에 대해 이 세상에 존재할 지 말지 정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는 더없이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는 명제지만 그것이 현대 인간사회에서 합의된 사항이며, 향후 몇 세기 동안 이 명제가 틀린 명제가 될 가능성은 지구 멸망 직전이 아니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후세의 자국민들이 오히려 민감하게 경악하는 명백한 중범죄이며, '홀로코스트는 존재했다' 는 '앨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지 않다' 급의 진실로 이미 입증됐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틀릴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래도 현재 드러난 모든 정황과 가치판단에 의해서는 진실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문명인이라면 부정할 수 없는 명제다.

중후반까지, '감정적이고 징징대는 여성' '언론과 대중의 여론에 민감하고 근본없는 미국인' 자체인 메인 캐릭터(레이첼 와이즈)를 보며 짜증이 나다가 어느 순간, 업무 중에 사사건건 부딪치던 어떤 동료와 갑자기 합이 맞으며 화해한 기분(가상의 기분이다. 이런 적은 사실 없다. 안 맞으면 대부분 끝까지 안 맞는다)이 들며 왜 레이첼 와이즈가 이 역할을 선택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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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나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부당한 일을 당했거나 불이익을 당한 사람에게 (가족이나 친구가 아닌 제3자로서는) 공감을 표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사실 정말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 채 그를 위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나 본인이 부당한 일을 당하는 피해집단과 교집합이 없는 상태일 때 그들을 두둔해야 더 효과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내가 이렇게 당하고 있다"가 아니라 "여기 이 사람들이 이렇게 당하고 있다"라고 할 때.

그런데 이 영화의 마지막엔 좀 달랐다. 누구보다 언론 플레이나 감성적으로 대중을 움직이는 일에 능하다고 하지만, 재판 중의 레이첼 와이즈는 중간에 내내 징징대며 감정적으로 굴어 나의 혈압을 올렸다. 그러다가 마침내 재판귀신들의 역할이 끝난 뒤 본인이 귀신같이 제일 잘 하는 일을 해냈다. 그게 바로 그 혈압오르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결국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렇게 뜨거운 온도로, 사이다로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인물, 나와 내가 속한 집단 속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크게 소리내어 말할 수 있는 인물이 지금 우리사회에는 많이 필요한 게 아닐까도 싶다.

영화 속 영국 변호사들이 뜨거운 가슴으로 싸움에 임하는 레이첼 와이즈의 눈에 일견 냉정해보이고 피해자를 배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고 그것은 그냥 그들이 '거기 있는 이유'이다. 공감하지 않으면 이런 치사하고 더러운 싸움에 애초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피해자를 가해자의 전면에 방패로 내세우거나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데 이용할 생각이 없었다. 있었던 일을 없다고 하니 있었던 정황을 보여주고,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니 그게 거짓말이라고 밝혀서 이기면 그만인 것이다. 도덕과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영리하게 이기는 것이 가장 피해자를 위하는 길임을 변호사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제3자가 할 일이다. 같이 울어주고, 손 잡아주고, 개개인의 감정에 북받힌 요구를 들어주는 일은 다른 사람의 역할이거나 이긴 후의 후순이다. 무조건 이겨야 한다.

굳이 정의 타령을 하지 않더라도, 사회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질 때 그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은 지극히 자신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내 힘보다 큰 힘에 의해 부당한 일 겪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사회에 부당한 일이 벌어질 때 그 부당함을 참지 않는 것은, 언젠가 자신이 그 부당한 일을 당하는 집단에 소속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지극히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위안부, 세월호, 독도, 동성애, 이 이슈들에 있어서 얼마나 합리적으로 행동했나. 그들의 아픔을 그들만큼 똑같이 느낄 수 없다면 합리적이기라도 했었나. 이 영화 속 영국 변호사들처럼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철저한 공감과 존중을 바탕으로 한 채, 피해자들을 전면에 방패로 세우지 않고 냉정한 온도로 적과 싸우지는 못할 망정. 아니면 영화 속 레이첼 와이즈처럼 뜨겁고 시원하게, 그들을 두둔하는 말이라도 눈치보지 않고 용기있게 쏟아내며 사회적 영향력을 끼쳤던가.


우리에겐 슬픔 정도로 끝날 수 없는 일들이 아직 너무 많이 있다. 아직도 극복되지 않는 슬픔들. 직면하고 또 직면해보기도 하고 가슴아파 얼굴 돌려 회피도 해 보고, 그래도 경악스럽고 슬퍼서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이 너무 많이 있다. 앞으로 무엇이 되든 무엇을 하든, 모든 사람들이 사람의 생명과 사람의 인권이라는 가치를 다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여기고, 그것이 당연한 사회가 되기를. 나부터 그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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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1.

기자들 앞에서 맥락에 안 맞는 사사로운 아재 농치고, 지고도 이겼다고 우기고, 본인의 운명을 쥔 판사한테는 '마이 오너'를 문장마다 넣으며 애교부리면서 약자 앞에서는 잡아떼기 귀신인 어빙 박사는 자꾸 보니 귀엽고 정들 지경인데, 보면서 대선주자 중 한 분이 떠올랐다. 나만 그런가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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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2. 영화 속에서는 반가운 얼굴들이 꽤 보인다. ㅋㅋㅋㅋㅋ
모리어티라든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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