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음료처럼 상큼한, 미완의 풋내기 히어로
신, 외계왕족, 괴력의 외계인, 지구에서 손꼽히는 재벌, 지구에서 제일 힘센 사람들 사이에 낀 미완의 청소년. 대다수의 문화 콘텐츠는 구매력이 있는 연령층을 타깃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 히어로물의 주인공들 연령이 거의 모두 30-45세로 추측되는 요즘, 미완의 아름다움을 알려주러 나타난 풋내기.
이번 시리즈는 물론 마블답게 재기발랄 유머러스하지만, 재미의 상당 부분을 배우와 캐릭터의 '젊음'에 빚지고 있으며 이번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키워드가 젊음이다. 신선한 청량음료 같은 히어로, 스파이더맨 피터. 토니 스타크가 진한 사골 설렁탕이라면 스파이더맨 너는 청량한 포카리스웨트 라라라라라라라~
스파이더맨: 홈커밍(Spiderman: Homecoming)/2017
-존 왓츠
-톰 홀랜드, 마이클 키튼,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존 파브로
평범하던 학생이 나름으로 고뇌하며 성장하는 가운데 동질감과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도록 한다는 스파이더맨의 큰 취지 중 하나가, 개인적으로는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이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보다 훨씬 잘 느껴졌다. 사실 원작이랑은 가장 거리가 먼데. 토비맥과이어는 너무 거만한 중2병 느낌이라 악당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있어도 별로 안타깝지가 않고, 앤드류는 잘생긴 빙구 느낌 이상으론 몰입감이 없는데 이 스파이더맨은 묘하게 응원하게 된다. 울지말고 일어나, 그래 잘했다. 그래 너답네, 하면서. 학생다워서 예쁘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든 게 애초에 또 주요구매층을 겨냥한 게 아닐까도 싶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실 수많은 히어로 중 가장 인기있는 인물이 토니 스타크라는 것이 씁쓸할 때가 있는데(물론 이견없이 매력적 인물이지만, 유머감각도 제일 뛰어나고), 다행히 마블 스스로 그에 대해 인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희미하게 느낀다.
토니 스타크는 천민자본주의에 종종 영합하는 인물이지만, 유머러스해서 물론 밉지 않다. 어쨌든 마블은 히어로 중에 가장 인기가 많은 그에게 요즘들어 좀 가혹해서, 다소 경거망동할 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도록 만들고 있다. 이번에도 이 부르주아에게 결국 앙심 품은 것이 프롤레탈리아 악당 리즈 아빠인데, 그래서 결과적으론 악당이 평면적이지 않아서 좋았고, 악당이 같은 프롤레탈리아 청소년 영웅에게 다들 자기 잘 먹고 잘 살 궁리만 하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할 때는 굉장한 설득력이 있었다.
어차피 생산수단 소유한 자본가 토니는 계속해서 잘 살 것이고, 프롤레탈리안들은 계속 그 아래에서 진짜 착취자와 가해자가 누구인지 모른 채 서로를 헐뜯으며 아웅다웅 싸울 것이다.
며칠 전에 버트런드 러셀의 '자유로 가는 길' 읽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다. 마침 딱 토니가 피터에게 노동자 계급 히어로라고 하길래. ㅋㅋㅋㅋㅋ
그 MJ가 메리제인 아니라고 말해줘. 제발. 아......안 돼!! 그냥 떡밥이라고 말해줘
제작진이 아니라고는 했다는데,
그래도 무서워 ㄷㄷㄷㄷ
의식적으로 인종차별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특히 피터가 처음 리즈에게 반하는 장면에서는 편견을 꼬집는 의도성도 느껴졌다. 피터의 시선이 고정된 여학생 무리 중 너무 당연하게 센터의 금발 백인 여자 아이 쪽으로 시선을 따라 가는데 피터와 눈을 마주치고 웃어주는 건 뒤에 있는 예쁜 흑인 여자 아이이다. 교장도, 해킹을 잘 하는 베프도 유색인종이고 클래스를 유색인종이 절반 가량의 비율로 채운다. 아 이건 또 아시아 시장 규모를 의식한 건가.
그리고 리즈의 아빠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홈커밍 파티 파트너가 돼 달라고 리즈에게 프로포즈하고, 오케이를 받은 피터. 사실 생각해보면 흑인인 리즈 엄마가 엘리베이터 사고 당시 먼저 등장했었고, 아빠가 백인이라는 추측은 가능한 데다가 그동안 봐 온 스파이더맨 시리즈로 미루어 볼 때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 데도 '헉'했다. 예측하지 못한 것이 사실 내 무의식 중에 있는 인종에 대한 편견 탓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모가 젊어진 것도 가볍고 상큼하게 볼 수 있는 요소인 것 같다.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삼촌, 여자 친구, 친구 아빠 등 너무 가까운 이들이 스파이더맨의 의무와 연관되어 죽거나 다치는데 그런 것들을 보는 게 좀 힘들어서 개인적으론 괴로워하면서 봐 왔다. 사실 그 박복한 인생, 책임없이 행동한 결과에 대한 부채감, 공사 역할 갈등 같은 것이 스파이더맨의 핵심 내용이기도 하지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이 대사는 이번 시리즈에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모든 시리즈 중 가장 스토리를 통해 이 대사를 가슴에 되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식상하던 메시지가 이제야 신선하게 와 닿는다. 배우와 영화가 상큼하니 그동안 그랬던 것과 달리 스파이더맨이 저지르는 실수들이 짜증나지 않아서인 것 같다. 사실 스파이더맨이 큰소리 땅땅 치다가 저지르는 실수들, 역할 갈등 하다가 잘못 택한 결과들(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동안 너무 무서운 결과를 초래했지 않은가.
아킬레스는 트로이에서 신이 인간을 질투한다고 했다. 유한한 삶이라는 부족함, 미완이 주는 가치 때문이다. 스파이더맨 또래의 청소년들에게는 안정된 힘을 이미 가진 히어로들이 동경의 대상이겠지만 스파이더맨은 나름으로 그들만큼 아름답다. 다소 산만하고 실수도 많지만 그 연령대의 사고처럼 유연하게 휘고 팔딱팔딱 생동감 넘치는 신체 자체가, 원작자가 의도한 젊고 철없는 히어로를 묘사하기 위한 모습이었을까 싶다.
젊은 것 빼면 시체지만 난 꿈이 있어어어어
영국 빌리 엘리어트 연극 주연이었던 톰 홀랜드는 운동신경이 뛰어나 본인 인스타그램에도 뛰어난 운동신경을 자랑하는 포스팅을 자주 하고, 아닌 게 아니라 그동안 나온 모든 스파이더맨 중에서도 가장 날렵하고 유연해보인다. 원작자가 왜 이렇게 흉한 쫄쫄이와 흉한 동작들을 그려냈을까 그동안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는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이해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히어로물 속 소비자본주의
요즘 영화화된 히어로물을 보다보면 10,20년 전 히어로물에 비해 물질주의의 색이 짙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그들이 커스터마이징하여 갖추고 있는 장비들이 매우 흥미진진 신박하긴 한데, 옛 히어로물에서는 육체 능력의 확장에 대한 인류의 로망이 느껴졌다면 요즘은 막대한 개인자본을 바탕으로 한 능력에 대한 로망이 많이 느껴진다.
육체능력의 확장이 육체 자체의 진짜 진화, 변형보다는 장비를 통해서 오는 추세도 꽤 있다.
장비 없으면 탈탈 털릴, 사실 슈퍼파워 자체는 없는 아이언맨이 요즘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많은 히어로물이라는 것도 상통하는 대목(실제로 장비 없을 때 캡틴 아메에게 처참하게 쥐어터짐).
특히,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 사람이 소비한 물건이 그 사람의 취향과 경제력을 포함한 정체성을 어느 정도 말해주는 시대가 오다보니, 어떤 신박한 기계가 나오고, 어떤 수트, 어떤 시계, 어떤 차가 나오는지도 회자된다. 요즘 영화에서는 정신적으로 피폐할지언정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지 않은 히어로를 찾기가 어려움. 근육질의 슈퍼파워, 맨 몸 하나만 볼만한 잘생긴 슈퍼맨은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약간 매력도가 떨어졌다.
예전 히어로 영화들 속에선 배트맨 정도가 차나 집, 집사를 자랑하던 부자 히어로였다면 요즘 부자 아닌 히어로는 냉동됐다 살아온 옛날 캡틴이나 헐크 정도 뿐인 듯. 하물며 어느날 우주에서 뚝 떨어진 히어로는 한 왕국의 주인이니 말이다. 가장 최근에는 심지어 금수저이다 못해 신의 딸도 등장. 스파이더맨은 엄청난 부나 슈퍼파워를 가진 어른 히어로 틈 속, 모든 면에서 평범한 청소년이라는 게 딱 매력포인트인 히어로이니 열외.
변화하는 히어로물의 추세
물론 원작은 예전부터 있었지만 영화화되고 인기를 끌법한 콘텐츠로 간주화되는 히어로물의 성향이 조금씩 변하는 느낌. 무조건 정의롭고 착한 것보다는 비뚤어졌든 바람둥이든 뭐든 자기만의 스웩이 좀 있는 성격이 선호된다.
진득하고 고지식하던 옛 히어로들에 비해 다소 거만한 태도, 냉소적 유머를 갖춘 성격도 요즘 히어로들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