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도덕적 금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곳, 밤인데 낮인 파리
거의 10년이 흐른 후에야 밤과 낮을 보았다. 9년 전에 봤으면 이게 무슨 얘긴지 도통 이해 못했을 것 같다.
왜 야한 장면이 없어도 청불일까 궁금했는데 감독이 본인 영화는 인생의 사이클이 좀 돌았다 싶은 어른들이 봐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청불로 요청한다고 한다.
시작과 끝에 흐르는 베토벤 7번 2악장이 정말 좋다. 영화 끝나고나서, 며칠 내내 들었다.
거의 다 좋았지만 봤던 홍상수 영화 중 최고였다고 생각하고 있음.
파리 로케로 촬영한 영화지만 파리의 큰 뷰나 랜드마크 건물, 아기자기 그림처럼 예쁜 모습을 듬뿍 담지 않아서 더 더 마음에 들었다. 당연히 아무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여행, 예술이 아니라 민박집과 낯선 땅에 와 있는 한인들의 이동 루트를 중심으로, 생활의 보풀이 그대로 드러나게 담겨서 좋았다. 주인공은 후즐근한 옷차림에 깜장 비닐봉다리를 들고 활보한다.
나는 파리가 아름답지만 적당히 지저분해서 더 아름다워 보이고 좋았는데, 이 지저분함이 몇몇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준일 수가 있어 '파리 쇼크'라는 말까지 존재한다. 매체에 소개되는 아름다운 파리에 대한 기대를 품고 간 사람들이 파리에 대해 받는 쇼크를 말한다.
모든 게 홍상수 영화 그대로이지만 파리에 온 대신 '밤'에 함께 기울이는 '소주'는 빠졌다.
2014년 여름에 파리에 갔었는데, 10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아서 기묘하던 그 기분이 영화 속에 그대로 살아있었다. 아, 오르셰 ㅜㅜ
성남이 결혼한 유부녀 옛 애인을 지하철 역에 데려다 주는 시각은 사실 어두워야 하는 저녁이거나 밤이다. 밝은 햇살 아래에서 옛 애인은 만취하여 집에 들어가기 싫은 뉘앙스를 던지지만 성남은 도망친다.
어딘가에서 옛 애인의 프랑스인 남편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아(너무 밝기도 하니까) '너무 긴장해서 발바닥에서 땀이 다 났다'고 한다.
알딸딸한 기분으로 적당히 서로 예뻐보이는 저녁이 아니라, 대낮의 햇살 아래 떠다니는 먼지들 사이에서 민낯으로 떡 하니 서 있는 상대방을 바라보는 기분.
밤과 낮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꿈과 현실의 구분도 모호해지고 욕망을 상상만 하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것의 경계도 모호해지고.
성남은 옛 애인과 함께 있던 도중 유정을 만난다. 민박집 주인이 소개해준 유학생 현주의 룸메이트도 알고보니 유정이었다. 두 여자 모두 유정을 신랄하게 비난하지만 처음 본 흥미로운 이성에게 꽂힌 성남의 귀에는 그 비난이 들어올리 없다.
계속해서 유정을 생각하고 그리는 성남. 이유가 어딨겠는가. 그냥 성남 눈에 유정이 예뻐서이다.
낯선 땅에서 만난 매력적인 낯선 이성. 신비로운 동시에, 외롭고 고립된 곳에서 누구보다 친근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 상반된 두 요소의 공존은 거부하기 힘든 매력이다.
낯선 땅에서의 사랑에는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정된 기간이라는 요건도 주어진다. 한정성 역시 마음껏 주어진 기간 동안만 사랑할 자유와 한정된 기간 동안만의 사랑이라는 안타까움을 동시에 주는 굉장한 촉매이다.
8시간 떨어진 곳에 밤낮도 다른, 다른 시간대를 다른 땅에서 사는 와이프는 잠시나마 잊기가 쉬운 것이다. 하다못해 활동하고 돌아다니는 낮 동안 만이라도.
현주가 은근 성남에게 호감을 갖고 계속 희미하게 끼를 부려보지만 셋이 있을 때 성남의 관심사는 오직 유정에게만 향해있다. 내내 성남의 영혼없는 리액션을 들으며 들러리 중인 현주.
가끔 술을 먹을 때 옆 테이블에 젊은 남자 1 + 젊은 여자 2 의 조합이 있으면, 종종 목격되는 느낌의 긴장감이다.
셋이 여행갔을 때 여자 둘이 싸우고, 화가 나서 앞서가는 여자 뒤로 남녀가 손을 잡고, 앞서가던 여자가 뒤돌아보녀 "뭐하는 거야?" 라며 더 화내는 대목도 킬링파트.
유정에 대한 흥미가 폭발하던 중, 성남은 두 여자가 사는 집에 현주를 보겠다고 가장하여 방문. 이불 사이로 발만 내놓고 떡실신해 있던 유정을 본 성남은 꿈을 꾼다. 꿈 속에서 성남은 무의식중에 있던 욕망을 발현하는데 유정의 반응은 싫지 않은 느낌이다. 희망적. ㅋ
어쨌든 실제로도 유정과 매우(?) 가까워지는데 성공한다.
낮에 저러고 앉아있는 유정을 보고 성남이 혹해서 다시 되돌아와 말 거는 장면도 매우 리얼돋음 ㅋㅋㅋㅋ
낮에는 유정과 연애를 즐기고,
밤마다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전화기를 붙들고 울어대는 성남. 극중 와이프가 무려 황수정이다. 이게 정말 옛날영화구나, 했던 대목.
밤과 낮,
꿈과 현실,
욕망하는 것과 욕망의 실천,
낯익음과 낯섦,
파리의 아름다움과 더러움,
예술과 (실제)생활,
예술과 외설,
진실과 거짓말,
목적와 성취,
진짜와 가짜,
쾌락과 도덕적 금기,
그리고
남한과 북한(이선균).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