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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Aug 09. 2018

스플라이스(Splice)

낯선 종족에게서 인간의 향기를 느끼는 것에 대한 본능적 불쾌함





본능인지 학습인지 인간의 기준에서 추하다 여겨지는, 사람과 아주 다른 이질적 생명체-예를 들면 바퀴벌레-를 보면 매우 불쾌하지만,

 "낯선 종족에게서 인간의 향기를 느끼는 것"은 그보다 더 불쾌하게 느껴진다.




생명공학자 부부인 클라이브(애드리언 브로디)와 엘사(사라 폴리)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단백질 분자 연구 도중 여러 생물의 단백질 DNA결합체와 인간 유전자를 합성하여, 인간에 가까운 모습이지만 동물의 유리한 신체장점들도 갖춘 새로운 생물체를 만들어낸다.


두 과학자가 창조한 드렌이 아예 애완동물같은 디자인으로 나오는 어린시절까지만 해도(사진) 그저 평소 즐겨보는 류의 생명공학 영화 느낌에 지나지 않았지만, 자라나서 성체가 되어 사람과 매우 유사하게 변하자 혐오에 가까운 불쾌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불쾌감은 영화가 의도한 것이다.

사람과 매우 비슷한 얼굴이지만 인간의 허용범위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미간넓이, 사람과 똑같은 체형인데 무릎 아래부터만 거꾸로 굴절되며 반대방향인 관절, 인체와 똑 닮은 등과 팔에서 갑자기 돋는 곤충의 날개.

빗방울을 받아 마시기 위해 낼름거리며 내민 혀가 파충류처럼 뾰족할 때, 사람의 얼굴에서 사람의 것이 아닌 혀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익숙한 예상과 빗나간 그 의외의 반전 요소가 불편해지고, 공포감마저 들게 된다.


인류의 공포심은 태고의 본능이 준 선물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게끔 도망 칠 시간을 만들어준다. 슬픈 예감도 언제나 틀리지 않지만 쎄하고 무서운 예감도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공포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공포의 대상이 언젠가 위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존재를 본능적 직관으로 알아챌 수 있다.



2009년에 이 영화를 본 후 소감을 위와 같이 적었었는데, 이 현상이 연구로 존재한다고 한다.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 언캐니 밸리)'라는 이론이다. 내가 이해한대로 예를 들어 이 이론을 설명하면, 사람은 로봇청소기나 <스타워즈>의 알투디투를 보고서는 불쾌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귀여워하고 신기해한다. <엑스 마키나>처럼 얼굴만 인간과 똑같고 다른 부위가 기계장치로 가득한 로봇은 기괴하게 느껴진다. 이 지점이 불쾌한 골짜기 지점이다.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은 로봇을 볼 때는 외관 때문에 불쾌하지는 않다. 도리어 호감도가 올라간다. 이 지점은 불쾌한 골짜기 구간을 넘어선 지점이다. 그러나 그 완벽한 인간의 외피에 메스를 긋고 안을 들여다 보았을 때, 응당 기대되는 내장과 혈관 대신 위화감 가득한 기계장치들을 보면 다시 불쾌하다. 이 지점은 다시 또 불쾌한 골짜기 지점이다.



모리의 이론에 따른 그래프(자료 =  KISTI)




공포영화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플롯이나 연출이나 크리쳐 디자인이나

그리 엉망으로 만든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극혐'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없는 영화다.

-라고 영화를 본 소감을 적었었는데, 이는 바로 이 영화가 불쾌한 골짜기에 의도적으로 사람을 빠뜨리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던 거다.


생명공학 영화를 볼 때 인간과 매우 다르게 생긴, 그동안 본 바 없이 새로 창조된 생명체의 디자인을 보는 것은 매우 즐거우며, 우주영화를 볼 때에도 인간의 모습에 약간의 변주를 준 새로운 종족-예를 들면 벌칸인-의 디자인을 구경하는 것은 SF 장르를 보는 즐거움의 5할을 차지한다.


이 영화는 정말 의도한 바 그대로, 그런 적당한 변주의 즐거움 대신 탁월하게 남다른 시각적 충격(혐오감)을 주는 데 성공한 것 같다. 더불어 정서적 충격도.

정서적으로도 '불쾌한 골짜기'에 관객을 마구 데려다 빠뜨린다.




끝까지 못난 연구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여주인공. 표현조차 식상한, "그릇된 윤리의식으로 무장한 과학자"가  연구 말미에 얼마나 장엄한 파국에 치닫게 되는 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수간, 근친상간까지 쿡쿡 쑤셔대어, 비주얼 쇼크 외에도 불쾌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동안 보아오던 생명공학 영화들과 느낌도 성격도 매우 매우 다르기는 했으나, 어쨌든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SF영화를 너무 많이 보긴 했나보다. 개구리 유전자가 섞였다는 대목에서는 창조한 생명체가 인간의 생식 통제에서 벗어나 혼자 성전환을 할 것이라는 예측을 이미 했다(시초는 마이클 크라이튼-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 엄마가 딸을 잊지 못해 예전 그대로 둔 집, 여주인공이 어린 시절 쓰던 방에서 요강인지 밥그릇인지 모를 철제원통을 보여주며 감금당했음을 암시한 것과, 자꾸만 엄마의 역할에 회의를 느끼는 여주인공을 보면서는 마지막에 여주인공이 괴물의 후손을 "임신"할 것이라는 예측도 이미 했다.


생명공학 영화들은 아프리카인지 아마존인지 어디에 산다는 그 희귀한 혼자 성전환하는 개구리의 소재제공 공에 대해 큰 절을 해야겠다. 혹시 효소 "M3"만 발견되면 저 비슷한 일이 실현되는 게 아닐까.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하여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과 봉인을 늘 해제한다.


날개가 없는 인간은 새를 질투하여 하늘을 날 수 있게 되었고, 우연한 이족보행으로 발달한 뛰어난 두뇌를 활용하여 생태계에서 쪼렙에 가까운 열악한 신체조건을 극복하고 먹이사슬 최상위자가 되었다.


늘 한계에 도전하던 인간은 신의 영역에 도전하여 동물을 복제한다. 그리하여 정글에서 인간을 살아남게 한 유일한 미덕인 이성을 잃고 스스로의 존엄을 파괴하며 인간을 상품화한다. 그렇게 차별화하던 동물들의 뛰어난 신체능력을 인간에게 주입하여 괴물을 창조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괴물에게 진다.


그리고 자신들이 멋대로 창조했던 괴물을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제거한다(엄마아빠, 누가 만들어달랬어? 왜 멋대로 날 만들어놓고 날 죽이려해? 라고 패륜급으로 따져도 할 말이 없을 상황).


이런 오랜 식상한 시나리오가 자꾸 재활용되는 것은, 심지어 이렇게까지 혐오스러운 형태로 적나라하게 그려진 것은, 그것이 사실은 정말 몹시 일어날 법한 일이라서 그렇다.


충격이 너무 커서 당분간은 No more monsters.                                  








*링크="불쾌한 골짜기" 이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기사. '불쾌한 골짜기'라고 포털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매우 불쾌한 유사 인간 이미지를 쉽게 많이 찾아볼 수 있다.


http://www.edaily.co.kr/news/news_detail.asp?newsId=01892566619109208&mediaCodeNo=257&OutLnkCh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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