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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

​어디서 본것같은 이사람, 언젠가 들어본것 같은 이말, 익숙한 이곳

by 랄라

북촌방향(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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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그게 다는 아니겠지만 인간은 마음을 담는 그릇인 신체의 컨디션에 따라 마음의 상태를 지배 받는 유물론적 존재이다. 인간이 호르몬의 분비에 따라 널뛰는 감정에 강제로 부여한 낭만과 순수성은 판타지일 수도 있지만 사실 그게 가짜 사랑인 것도 아니다. 사랑에 진짜 가짜가 어디 있겠는가. 오래 지속된다고 진짜인 것도 아니고. 알고보면 또 그 잠깐동안만큼만 따지면 그렇게 낭만적인 진심도 없다.


호르몬이 초래한 감정에 낭만과 순수성을 부여한 인간은 그 사랑의 순수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이성을 마비케 하는 이 생동감의 근원에 우연과 운명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사랑이 시작된 연유와 감정이 발전해 온 경로에 집착한다. 수많은 사람 중 하필 지금 여기에서 우리 둘이 만난 것은 분명 희귀한 우연이지만 주체가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행동도 취하지 않으면 의미 없는 일이 돼 버린다.


흰 천에 후 불어 흩뿌린 먹물처럼 무수히 많은 우연의 검은 점들을 어떻게 선으로 잇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지는 그 서사의 주인공 몫이다. 수많은 매일매일 중 어떤 날들과 어떤 시간들을 취사 선택해서 이 사람과 나의 역사로 엮을지도 서사의 주인공 몫이다.


북촌이라는 익숙하고 오래된, 낭만적인 장소에서 남자는 계속해서 '새로운데 낯익은 여자(?)'와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반복된 우연의 나비효과는 이렇게 시작된다. 혼자 좋아하는 고갈비 맛집(술집)에 가서 당연히 술을 먹는다. 먹다가 합석을 한다. 술을 많이 먹는다. 술을 먹으니 전썸녀(전여친에 가까운가) 집에 가게된다. 그리고 과거와 비슷한듯 다른 서사가 반복된다.




+나 정말 소름 끼치게 유준상이랑 똑 같은 남자 하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아. 이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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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뉴얼 뉴썸녀.

굉장히 이례적으로 엘리건트해보이고 복장도 우아하나 뭐 알고보면 역시 사람은 뻔해서

어차피 친근해지고(?) 나면 똑같은 여자다.




좋아하는 익숙한 장소, 추운 날씨에 내 앞에 따뜻한 체온을 유지하며 서 있는 낯선 듯 낯익은 이성,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섞여서 묘하게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게 하고 뜻밖에도 굉장히 설레는 감정마저 준다.

자기들끼리는 잠시나마 로맨틱하지만 제 3자가 한 발 떨어져서 들으면 굉장히 추악하게 느껴지는 사랑의 대사들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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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장해서 겨드랑이에서 땀이 다 났다' 라는 하이퍼 리얼리티 명대사.

정말 유준상이랑 똑같이, 피아노로 여자 꼬시려고 하는 남자를 실제로 목격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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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완전 전데요? 제가 그래요!" 라는 말을 두 번이나 되풀이하는 송선미.

술 마시면서 미묘한 기류가 흐를 때, 약간 못난이와 예쁜이의 애매한 경계에 서 있는 여자들이 남자화자의 관심을 끌고 싶을 때 자기도 모르게 잘 하는 어떤 찌질한 대사인데, "나 좀 봐줘! 너랑 나랑 잘 통해!"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홍상수는 그렇게 못생겼는데 어떻게 여자한테 이런 말을 들어본 건지, 이런 미묘함을 잘 아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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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을 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찌질한 남자 그 자체인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유준상은 더 하다. 최고다. 전여친 집에 술먹고 찾아가서, 황당해하는 여자의 말을 뭉개며 "응응...문 좀 닫을게"하면서 슬금슬금 대문을 비집고 들어가 여자와 마주하고, 슬금슬금 자기 등뒤로 문을 닫아버리는 장면은 정말. 웃김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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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본 것만 같은 이 사람, 언젠가 들어본 것 같은 이 말, 익숙한 이 곳. 새로운 설렘.




아직 안 본 작품이 많아서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봤던 홍상수 영화 중 최고는 밤과 낮이었고, 그다음이 이 작품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이상하게 유난히 더 말로 표현을 못하겠어서 슬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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