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 때리는 블랙 코미디_어떤 비극은 어떤 정치인에게는 호재
빅 쇼트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아담 맥케이의 전작 <빅 쇼트>를 재미있게 보았다면, <바이스>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씁쓸하지만 명치와 뼈 때리는 블랙 코미디가 생기있고,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비유하고 풀어서 전하는 아담 맥케이 특유의 화법도 여전하다. 정치적 편향성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영화의 의도나 핵심에 딱히 정치적 성향이 중요한 건 아니고, 그냥 잘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영화 자체를 즐기면 된다. 내 경우엔 평소 영화를 볼 때 그 안에 담긴 숭고한 주제나 정신, 선한 의도 따위보다 예술품으로서의 완성도가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아주 좋아하고 싶은 영화다. 아담 맥케이를 좋아하거나 조지 w.부시 시절의 도날드 장관과 비선 실세 부통령에게 관심이 많았거나, 역사와 정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강력추천할 만한 영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당시 미국의 정치 분위기를 잘 알았다면 더 잘 즐길 수 있었겠지만 어릴 때의 이야기라 확실하게 느끼기는 어려웠다. 9.11 직후 뉴스에서 자주 듣던 도날드 국무장관과, 늘 희화화되고 마는 부시는 대충 미디어에서 많이 접했지만 딕 체니마저도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래서 놓치는 블랙유머도 있겠지만 실존 인물을 몰라도 영화 속에서 다 설명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유머는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실제 역사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딕 체니가 심장이식 수술(현대의학에서 흔히 가능한 수술인지 잘 모르겠다)을 받은 것은 아니고 인공심장박동기를 달고 있다는 둥 하는 것도. 아담 맥케이가 수명이 다 돼 떼어내어 져, 시커먼 피를 머금고 죽어가는 딕 체니의 (구)심장을 통해 비유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뿐이다. 아무튼 커트(공여자)의......아니, 딕 체니의 새 심장은 잘 뛰고 있다.
딕 체니 하고 싶은 거 다 해
영화는 전 세계인을 테러의 공포에 떨게 한 시발점 9.11 테러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시점 전후 딕 체니 인생에서 세계인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 나비효과가 된 유의미한 시점의 일화들을 보여준다. 전 국민에게 라이브로 중계된 대미국 테러 쇼를 딕 체니는 철저하게 자신을 위한 쇼로 재이용했다.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십 만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아버지 부시의 망나니 아들 조지 w. 부시가 당선을 위해 흔히 별 권한 없다고 여겨지는 직책이었던 부통령직에 딕 체니를 앉히고 석연찮게 당선된 뒤, 딕 체니 하고 싶은 거 다 시켜 주었을 뿐이다. (물론 그 모든 게 절대적으로 한 사람이 다 초래한 것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아 저 사람이 이런 영향을 미쳤을 수 있겠구나 하고 보면 된다)
자유 수호국?
자유 수호국인가, 국제 경찰국인가, 세계의 깡패인가. 인도적 개입이란 빈대 한 마리 잡으려고 집에 불을 지르는 행동과 비슷한 것인가. 9.11에 이은 미국의 이라크 전쟁 도발은 역사상 최악의 대외정책이라고 평가되지만, 영화 속에서도 딕 체니가 그 비극을 자신의 기회로 활용하듯, 그게 최악인지 몰라서 전쟁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어떤 인류의 비극은 어떤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강력한 호재였을 뿐이다.
테러는 쇼다. 테러범들은 독자적 전쟁을 일으킬 병력이 없기 때문에 국지적 공격을 가하면서 가장 대중을 공포와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방법을 택한다. 가장 상징적인 랜드마크에, 가장 무방비의 사람들에게 랜덤으로. 누구나 테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가 만연하게 되는 것이 테러리스트들이 의도이다. 테러를 당한 국가는 국민의 공포와 혼란을 가라 앉히기 위해 막강한 물리력으로 대응하여 국가의 파워를 보여주려고 하는데, 이는 테러리스트가 가장 의도한 반응이기도 하다. 한 국가가 대대적으로 테러집단의 부족한 물리력을 커버하고 국가 단위로 광고를 해주면서 테러 집단의 영향력을 과대광고 해주는 것이다. 딕 체니에게 테러는 자신이 원하는 걸 갖기 위한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테러리스트는 국가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지 않다. 이라크전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지도, 위협하지도 않은 '국가 이라크'에 대한 엄연하고 확실한 침략 행위였다.
흰 지붕 아래에는 불여우만 가득하네
하늘 아래 천국은 없고 천사도 없다. 자유와 인권 수호가 국가 가치의 기반인 것처럼 바이럴 하는 지구 상의 깡패국인지 경찰국은 뉘른베르크 조약에서 주도적 목소리를 내었지만 내로남불이라고 자신들의 행동에는 다른 잣대를 적용했다. 물론 그게 진짜 몰라서 저지른 내로남불이었던 것은 아니고, 딕 체니는 그냥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질 계기가 너무 중요하여 다른 인류의 불행같은 사소한 것에는 무심했을 뿐이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전쟁 속에서 망망대해를 향해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 부녀자의 지옥같은 하루는 딕 체니에게 내일 자신이 쥘 권력보다 너무 먼 얘기였을 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쇼일 뿐이니까.
"안 미안한 거 어떻게 아는지 알아? 나라면 그랬을 것 같아서."
인상적인 다른 많은 풍자적 대사들보다 도널드 럼즈펠드의 이 대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부분의 번역에 감탄하기도 했다. 사실 가장 초장에 나오는 "ㅈㄴ"부터, "ㅅㅂ" "물 빼줄 때" 같은 번역 보고 '아, 황석희 번역가님이구나' 했다. 번역이 새로운 문학의 영역이 될 때.
셰익스피어 인용구는 명조체 류 폰트로 다른 대사와 구분을 두기도 하는 센스. 사실 서구 고전 인용구가, 우리로 따지면 한국영화 보다가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고 있고 없고" 뭐 이런 인용을 정치적 대사 안에 녹였을 때의 기분 같은 것일 텐데, 사실 누구나 교육과정에서 서양문학을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이걸 번역가님은 한 방에 해결해 버리는데, 센스있게 간단한 폰트 처리 하나 했을 뿐이다.
한국어를 풍부하게 쓰는 사람만이, 다른 언어도 더 풍부하게 더 잘할 수 있다. 특히 영화 번역은 매 대사 새로 재창조하는 것이나 다름없고,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관객에게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늘 황석희 번역가 님께 감사한다. 늘 좋은 영화만 번역해주셔서 감사가 배가되고!
너희들이 뽑은 나는 너와 네 가족을 지켜주었을 뿐이다
배경이 되는 90년대, 그 당시 영화 느낌이 나는 색감과 화면 속에서 마지막 즈음 딕 체니는 현재 시점의 인터뷰 화면 속에서만 HD 화질로 등장한다. 모공과 잡티 같은 것이 위화감 없이 얼굴에 착 붙는 분장이 인상적이다. 마지막 장면, 관객을 응시하며 '난 너와 네 가족들을 지켜준 것뿐이었어'라고 말하는 크리스찬 베일의 얼굴은,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죽빵을 유발하는 건가 싶은데, 사실 영화의 톤 자체가 덤덤하고 유머러스해서 별로 그렇지는 않다. 얼핏 맞는 말 아닌가 싶기까지 한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 같이 해온 게 다 정치인이고 미국인이고, 그렇지 뭐. 그게 아마 핵심일 것이다. 테러도 정치도 정치인도 전쟁도, 다 대중에게 보이는 이미지로 운영된다. 쿠키 영상은 개인적으로 뻔한 유머라고 생각했지만 영화에서 말하고 있는 중요한 핵심과 함께 가는 느낌이라 꼭 보고 나올 것을 추천한다.
잘생긴 배우들로 눈이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이 영화에서 빼놓고 볼 수 없는 것이 배우들의 연기와 분장이지만, 나는 스티브 카렐을 좋아해서 몰라보게 분장하고 열연한 크리스찬 베일보다 스티브 카렐 쪽의 연기에서 더 눈을 떼기 힘들었다. 나이를 먹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나오미 왓츠가 카메오로, 푸른 옷이 찰떡으로 어울리는 앵커로 등장하며(왠지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꿈 영역처럼 아스라한 느낌으로) 뉴스룸의 못난이(...) 메기도 나온다. 제시 플레먼스도 영드 블랙미러를 좋아한다면 익숙할 얼굴. 그리고 난 이제 더 이상 크리스찬 베일의 잘생긴 과거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대체 언제 잘생겼던 것인가.
잘생긴 배우들로 눈이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는 것이 좋다. 잘생긴 배우는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들의 명연기와 잘 생긴(잘 쓴) 대사들을 즐기는 것은 가능하다.
경제(빅 쇼트)-정치(바이스)-의학의 순서로 다음에는 아담 맥케이가 테라노스 사태를 다룰 것이라고 하고, 주연이 제니퍼 로렌스라고 하여, 차기작이 가장 재미있을 것만 같다.
*브런치 무비 패스로 시사 관람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