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운틴테라피
산행을 하다 보면 종종 부부싸움을 목격한다. 정확히 말하면 남편이 부인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장면이다. 대게 남편은 “체력이 왜 그 모양이냐!” “그래서 내가 너랑은 산을 안 간다” 등의 모욕적인 발언을 쏟아낸다. 몇 번 보다가 참지 못해 참견한 적이 있지만, 씁쓸함은 가시질 않는다. 나 아니, 우리의 모습이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Gas-Lighting 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타인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한 후 지배력을 행사하는 정신적 학대를 일컫는 말이다. 가장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오히려 더 잘 일어나고, 상대방을 교묘히 통제하는 방법이다. 나는 불행히도 오랜 시간 가장 믿었던 동료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한 적이 있다. 내가 자신과 회사를 완벽히 믿는다는 점을 악용한 경우다.
그의 특징은 자신의 거짓말을 숨겨야 할 때나 불리할 때 장시간 나를 설득하는 것이다. 의혹의 눈빛이 가실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나의 연약함을 끄집어내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한다. 이를테면 ‘과거에 어디가 아팠는데, 그게 재발한 거 아니냐’, ‘너의 부모님이 그래서 네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냐’ 등의 말로 본질을 흐리는 것이다.
결국 그와의 관계에서 나는 항상 미안함을 느껴야 했다. 적반하장인 상황은 억울하지만 그 일은내가 회사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그가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 편견이 의외로 많은 사람이라는 것. 폐쇄적인 의사소통 방식을 항상 사용하는, 사실상 많이 비겁한 사람이라는 걸 안건 긴 인연이 끝나고 3년이 더 지나서였다. 그리고 알았다. 정신적으로 더 연약한 상대방의 성격을 이용해서 서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가스라이팅의 핵심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후에 나 또한 일부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을 알았다. 가까스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정신적으로 연약한 상대라는 말이 많이 거슬린다. 실제로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타인을 잘 돌보며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고, 파트너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특성이 가스라이팅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고 한다. 즉,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을 변화시킬 의향이 높은 사람이 오히려 피해자가 더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서열을 따지는 관계는 항상 수치와 공포와 폭력이 따른다. 그래서 나는 그깟 오르막 하나 잘 못 오른다고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남편을 보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건 그 부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듣는 ‘너의 생각은 틀렸어’, ‘너는 그래’라는 말조차 상대방의 생각을 마음대로 바꾸려는 의도가 내재 돼 있다. 의도하지 않아도 가스라이팅의 요건이 갖춰지는 셈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자아를 흔들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고 상처를 주고 있다.
나는 상처받았다고 느끼면 산행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특히, 산행할 때 생각이 단순해지는 점과 미술관에 가면 그렇듯이 산에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이 온전히 나의 자산이 되는 게 좋았다. 이는 매주 1회 산행의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타인과 감정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오히려 자기 생각에 더 강한 믿음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았다. 한동안 산행이 마음을 잘 비우는 과정이라고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왔는데, 이제야 본질을 찾은 기분이었다. 다시 말해 생각을 전개할 때나 어떤 상황을 되짚어 볼 때 그것이 맞든 틀리든 혼자서 정리하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이 산행이며 이런 안정감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심리 상담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산행 때 혼자 하는 생각들을 꽤 중요하게 여기게 됐다.
그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나만의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