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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섬주 Oct 13. 2021

지는 해의 찬란함 -1

마운틴테라피

4년을 내리 현실에 아프고 빛(희망) 보다 온기(위로)가 간절했던 게 떠오른다. 눈부신 삶 대신 눈감지 않고 세상을 바라만 봐도 좋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첫 회사를 나온 후 지난한 이직을 이어갔다. 4년간 6개의 회사. 도무지 이 현실이 바뀌지 않아 노력의 양을 늘려보고, 방향도 틀어 보았으며, 재능과 환경 탓도 해보았다.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성의도 노력도 통용되지 않는 아픔. 이쯤 되면 넘어진 게 아니라 무너졌다고 하는 것이다.


아직도 매해 2월이면 몸이 아프다. 첫 회사를 나온 때이며 오래 고통받은 시절의 시작점이다. 나는 내 무지와 용기를 시험대에 올려놓고 실패를 거듭했다. 먼저 취업 경쟁 한번 없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 이직은 이성의 통제하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돌아보면 가장 냉철해야 할 때 가장 감정에 치우쳐 많은 일을 스스로 그르쳤다는 생각도 든다. 6년간 일했던 첫 회사 퇴직 후 상실감이 정말 컸다. 그 탓에 4개월을 그냥 흘려보냈다. 당연히 이직 준비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굴렀다. 어떻게든 이직은 해야 하니 아는 사람을 총동원해 방법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다 유일한 동종업계 지인이지만 친분은 없는 분까지 연락하게 되었다. 그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걱정을 많이 했다. 특히 내가 일한 자리는 공개 채용 없이 알음알음 구한다면서. 그의 말은 내 직장 운이 바늘구멍보다 더 작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정확했다. 알면 알수록 굳이 부족한 스펙을 꺼내지 않아도 갈 곳이 없었다. 인디언이 기우제를 지낼 때마다 비가 오는 것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는 기우제를 지내듯 이력서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또는 낚시꾼의 심정으로 이력서를 던졌다. 내 이력서는 지원 가능한 분야, 직군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이력서 회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연락이 아예 없거나 업무 경력이 많아 채용이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연락이 없는 건 괜찮았다. 다른 건 괜찮지 않았다. 연봉, 나이, 직책 모두 떼겠다는 내 애원과 부탁이 거절로 되돌아오니 서글펐다. 경력단절의 이유가 결혼, 임신, 출산만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차례 답이 없는 이직을 실행하고 소강상태로 2개월을 더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지인이 실패 원인을 분석해 알려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경력과 큰 연관이 없는 다른 분야 채용에 지원하였고, 늦지 않게 연락을 받았다. 나름 경력직 면접인데 멀뚱하니 대답만 하다 끝이 났다. 천만다행으로 입사가 결정 났다. 당장 취업 플랫폼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기쁨이 가장 컸다. 한 달 두 달 지날수록 삶에 생기를 되찾으며 순간순간에 감사했다. 타 분야 경력직으로 들어간 탓에 업무는 고되어도 마음에서는 빛이 났다. 7년 차 직장인의 노련함이 갖추어지길 기다렸다.


어느새 반년이 훌쩍 지났다. 삶의 변수는 늘 있기 마련이라는 진리의 말. 직장 생활이 절대 만만하지 않음을 일깨워주는 일들이 발생했다. 업무가 버거워 밤을 지새운 날이면, 의욕이 일어 목소리를 내는 날이면 유독 동료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따가운 시선은 내가 살펴야 하는 눈치와 함께 늘어났는데, 정작 이유는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소외되어 갔다. 어느새 왕따가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를 멀리했다. 회사 고위직들은 일부는 알면서 외면하고 일부는 아예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상태로 몇 개월 더 보내고 퇴사하던 날. 평소보다 심하게 명치가 조여 오고 한쪽 눈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급기야 하늘이 크게 한 바퀴 돌고 다리가 풀려 길가에 주저앉았다. 급하게 근처 병원을 찾았다. 정말 병원을 기어서 갔다. 의사 선생님도 처음에는 내 상태를 보고 걱정했지만, 뇌에는 별 이상 없는 것 같아 다행이라면서 처방전 하나를 써 주셨다. “스트레스 관리 좀 하시는 게 좋겠어요. 약 먹어 보시고 차도 없으면 바로 오세요!” 이 말을 듣자마자 몸이 굳었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저 말에 외로움이 터져버린 거다. 곧장 유일하게 내 편에서 방패와 칼이 되어주던 손 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지만 ‘당신도 아는 이 과거’가 내 미래를 옥죄일 것만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 않다고 나를 다독였다. 통화는 위로와 작별 인사가 뒤섞여 따뜻하면서도 아쉬웠다. 다시 뚜벅뚜벅 길을 걷는데 당장 오늘부터 두려웠다. “엄마에게 뭐라고 얘기한담.”


또다시 이력서를 준비할 때 뜻밖의 연락이 왔다. 나를 멀리하던 사람 중 한 명인 마케팅 부서 대리님이었다. 갑자기 연락해서는 만나자는 것이다. 그를 보는 건 아직 잔뜩 불쾌할 것 같았지만 어쩐 일인가 싶어 보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가 먼저 와 있었다. 하필 카페 문 정면에 떡하니 앉아 있어 들어가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반가움은 못내 감추는 것이 보였다. “하긴 아무 거리낌 없이 반가워하는 게 더 이상하지.” 나는 그의 미소 몸짓 다 모른 척하며 합석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어색한 분위기에 어색한 인사를 던진다. 그러고는 무릇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그 대표님 있잖아요. 000 대표님. 대리님 퇴사하시고 조금 지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어요. 아, 대리님과는 상관없고요. 듣기로 회사 부채가 감당이 안 돼서 그랬다고… 직원들도 하나둘씩 퇴사하고 회사는 이제 곧 문을 닫아요.” 이 이야기를 내게 왜 하는 것일까. 마음이 복잡해졌다.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 아니면, 불행의 형평성이라도 알리고 싶어서? 그래도 한 가지, 감당할 수 없는 돈의 크기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이른 죽음 앞에서 극도로 외로웠을 대표의 마음은 알 듯했다. 대리님은 다시 말을 이었다. “손 팀장님께 자세한 이야기 들었어요. 제가 오해했습니다. 사람들 말을 다 믿는 게 아닌데 죄송합니다.” 갑작스럽기만 이 사과 발언은 대체… 사과는 받는 사람이 인정할 때 성립되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내 대답은 내게도 중요했다. 하지만 아픈 기억이 재편될 순간을 맞았다. 무엇보다 수치심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을 보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유일하게 사과한 그가 고마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내 주요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비유하자면 손가락 하나 넣을 작은 틈에 불과할지 모르는데 희망적이고 빛과 같다. 이 작은 빛에 숨통이 다 트인다. 사실 나는 그사이 한 회사에 입사했지만, 성희롱을 일삼는 대표를 겪고 빠르게 그곳에서 나온 후였다.


굳이 따져  번째 이직 면접을 보러 가는 . 유난한 더위에도 바람이 시원한  어쩐지 좋은 예감이 들었다. 빠르게 입사 결정이 났다. 나는 비교적 오랜 시간 일반적인 회사 시스템에서 벗어나 마치 자영업자처럼 일했다. 다르게 말하면 일과 삶은 분리되지 않았고 관계는 서투를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이 과거 소외된 이유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권한을 가지고 일한 습관 때문에 더러는 독단적으로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만큼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관계에 성의를 다하겠다고 다짐하며  출근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회사의 포트폴리오를 오래전부터 사랑했다. 화려해서도 아니고 유명해서도 아니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누구를 동경하고 무엇에 집착하고 어떠한 노고를 감내하는지 충분히   같기 때문이었다. 나도 해봐서  아는 일들이었다.


입사 2개월 후. 대표가 이른 아침 면담을 요청했다. 마침 기분 좋은 소식으로 업무 보고를 앞두고 있어서 잘됐다 싶었다. 출근 시간 전. 아무도 없는 회사 내부 한편에 오픈되어 있는 대표님 자리로 향했다. 자리에 거의 다다랐을 때 대표님이 들어왔다. 회사에는 대표님과 나 단 둘 뿐이었다.


“김 팀장 먼저 미안하네. 회사 사정이 나빠져서 아무래도 파산신청을 해야 할 것 같아. 이제 와 말하는 게 좀 그렇지만, 지금 하는 김 팀장 업무만 잘 끝내고… 회사는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이직을 알아보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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