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경상도 말모이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말이야, 막걸리야?"
딸아이와 대화하던 중 내 말이 끝나자마자 한 말이었다. 한동안 안 듣고 살았던 말이라 오랜만에 들으니 반갑기도 했다.
"말이야, 막걸리이야, 야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기는 하네. 근데 어쩌다 말이랑 막걸리가 세트가 됐지?"
"몰라, 전에부터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도 말이야, 막걸리야 많이 썼는데. 'ㅁ'으로 시작하는 라임 맞추려고 그랬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말과 막걸리는 'ㅁ'으로 시작하니 라임과 랩을 선호는 아이들이 조어해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말이야, 막걸리야'보다 더 앞서서 "말이야, 방구야?"라는 말이 있었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놀이를 하거나 조분조분 이야기를 나누다 혜란이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면 민순이는 "말이가, 방구가, 뭐라카노?"라고 쫑꾸(놀림)을 주었다. 그러면 혜란이는 "말이다! 니는 그것도 모르나?"라고 받은 쫑꾸룰 되돌려주거나 "방구다! 그래서 뭐 우짤낀데?"라고 퉁을 놓곤 했다. 누군가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하면 우리들은 "말이가, 방구가?"라는 말로 누군가의 말이 되지 않는 말을 비꼬곤 한 것이다.
하지만 친구들이 "말이가, 방구가?"라고 말할 때 나는 "말이가, 주우가랭이가?"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와 엄마에게서 듣고 보고 배운, 누군가가 말이 되지 않는 말을 할 때 우리 가족이 하던 말은 "말이가, 주우가랭이가?"였다. 혜란이와 민순이랑 놀 때 내가 "말이가, 주우가랭이기? 똑바로 말해라"라고 하면 두 친구는 "가쓰나, 뭐라 캐쌌노? 뭔 말이고?"라며 내 말을 알아듣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네들은 그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만 "말이가, 주우가랭이가?"라는 말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이미 내 입에 붙은 말은 '말이가, 주우가랭이가?'였고 나는 필시 말의 생성과 존재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유를 알아내어 친구들에게 아는 체를 하며 근거를 대고 싶었다.
하루는 엄마한테 물어보았다.
"엄마, '말이가 주우가랭이가'가 무슨 말인데? 엄마하고 할매말고 딴 사람들이 쓰는 거 내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지어낸 말 아이가?"
"내가 무슨 박사가? 지어내긴 뭘 지어내? 원래부터 있는 말인데."
"우리 친구들도 모르고 친구들 엄마도 모르더라 카던데?"
"모르기는 뭘 몰라? '말'도 모르고 '주우가랭이'도 모른다 말이가!"
"그기 뭔데?"
"남자 한복 바지가랭이를 '말'이라 칸다아이가? 주우가랭이는 주우, 그 즈봉 끝에 가랭이고. 학교 다니는 것들이 그런 것도 모리나?"
그럼 '말이가, 주우가랭이가'는 말이 어째서 왜 쓰는지 엄마한테 물어보니 엄마는 "몰라, 나도 어릴 때 어른들이 쓰길래 따라서 쓴 건데. 우찌해서 쓰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지"라는 용두사미 같은 대답을 하였다. 이런 애매모호한 대답으론 친구들을 설득할 수 없었다. 친구들에게 내 말과 그 말의 정통성을 늘어놓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논리가 부족했다. 나는 애써 분을 삭이며 '말이가, 주우가랭이가?'의 대중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고등학생이 되었다. 가사 시간이었다. 가사 선생님은 당시 나이 오십을 넘긴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날은 우리의 한복에 대해서 배우는 날이었다. 선생님은 한복의 명칭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저고리, 치미, 동정, 깃, 고름, 두루마기 같은 단어들이 교실 안에 떠다녔다. 그때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남자 한복 바지 끝단의 이름은 '말'이다. '히히힝'하는 말 아니고 입에서 나오는 말도 아니다. 한복 바지 끝단 이름이 말이다."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이 끝나자 "오~~~"하며 처음 들어보는 단어를 신기해했다.
"너거들 '말이가? 주봉 가랑이가?라는 말 들어봤나?" 선생님이 질문을 하였다. 우리는 합창을 하듯 아니라고 대답을 하였다. 대신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현진이가 "말이가, 방구가?"고 하는 말은 자주 하느데요, 선생님"라고 우리의 합창 대답 끝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선생님은 현진이의 말에 싱긋이 웃으며 이야기를 하였다.
"야들아, 원래는 '말이가, 방구가?'가 아니고 처음에는 '말이가? 주봉 가랑이가?'였다."라며 말을 시작하셨다. 나는 너무 반가운 나머지 "선생님, 우리 엄마는 말이가? 주우가랭이라고 하시던데요."라고 손을 번쩍 들고 시키지도 않은 말을 먼저 해버렸다. 선생님은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말은 원래 남자 한복 바지 끝단을 말하는 순우리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가 되고 신문물이 들어왔는데 이때 신식 바지도 우리나라에 들어왔는 거라. 신식 바지를 일본 사람들은 주봉이라 했거든. 바지를 불어로 즈봉이라 하잖아. 일본 사람들이 발음이 안되니 주봉이라 한 모양이라. 이 신식 바지가 한복보다 만들기도 편하고 입기고 편했거든. 그래서 바지 입는 사람이 자꾸 늘어났네. 신식 바지를 입는 거를 못마땅하게 느낀 사람들이 신식 옷 입는 거를 보고는 옷을 입은 건지 안 입은 건지 비꼬는 말로 '지금 말인가 주봉 가랭인가?'라고 했다네. 이 말이 세월이 흘러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황일 때 쓰는 말로 바뀌었지. 알겠나?"
선생님의 설명에 나는 비로소 내 궁금증을 풀 수 있었고 동시에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할머니가 쓰시던 언어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근거를 확보하게 되었다. 나는 옆을 쳐다보고 뒤를 돌아보며 어깨에 힘을 주고 눈에 힘을 잔뜩 주었다. 힘이 들어간 내 눈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봐라 이것들아, 우리 엄마가 없는 말을 막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옛말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데. 이제 알겠나!"
요즘은 '말'이 한복 바지를 칭하는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할 것이다. 그래서 '말이야, 방구야?'의 기원이 '말이야, 바짓가랑이야?'인 것인 줄 모르는 것을 당연할지 모르겠다.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이다. 사람들이 쓰면 더 발전하는 것이고 쓰지 않으면 그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말이가? 방구가?'의 말의 기원이 무엇인지 지금 생활에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마는, 나는 여전히 습관이 된 '말이가? 주우가랭이가?'라는 말을 더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쓰면 사람들과 소통에 어려움이 있다. 기원을 잃어버린 생명을 다한 말을 쓰는 것과 사라져 버리는 사투리에 대한 아쉬움 사이에서 가끔은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라져 가는 사투리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