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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Oct 16. 2021

술이 '엉글나는'엄마, '히마리' 없는 딸

다섯번째 경상도 말모이

-엉글난다

작년에 퇴직한 오빠는 팔순넘은 엄마에게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온다. 퇴직 전보다 시간이 나기도 했거니와 코로나로 외출에 지장을 받은 엄마가 격심한 외로움에 몸부림칠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며칠전에도 해거름에 오빠가 엄마집을 방문했다.약간 얼굴빛이 불콰해진 상태로.

"니 술 뭇나? 얼굴이 벌~건거를 보이 한잔 했는갑네?"

"에헤이, 우리 모친 귀신이네. 간만에 전 직장동료들 만나서 쬐매이 마싯심더. 진짜 딱 한잔만 했심더."

 "니 당뇨도 있고 혈압도 있는데, 어이? 니 나이도 있고, 어이? 자꾸 술 무가 될것가 말이다!"

"한 두잔 정도는 괘안심더."

"괘안키는 머가 괘아네! 너거 아부지 술 묵고 고생한거 생각안나나? 아이고 무시래이~~. 내사 마 술이라카믄 엉글난다마!"


낯빛이 진지하게 변해서 화를 내는 엄마를 보며 환갑이 넘어 머리가 온통 새하얀 오빠가 엄마를 아기달래듯 달랬다. "조심하께. 내는 아버지맹키로 들이붓지는 안심더."


우리 아버지는 술고래였다. 그 놈의 술 때문에 엄마는 해만 저물면 늘 노심초사였다. 행여나 아버지가 술 한잔을 걸치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마실까봐였다. 자식인 우리는 우리대로 해가 졌는데도 아버지가 집에 오시지 않으면 걱정이 태산이었다. 아버지가 술과 함께 귀가한 날, 아버지는 날이 새도록 우리를 무릎 꿇여놓고 가정교육, 정신교육을 시키셨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때문에 평생을 걱정을 안고 사신 엄마는 '술이 엉글난다'고 했고, '술 먹고 진상부리는 사람이 엉글난다'고도 했으며, '술 먹고 병을 얻은 사람들한테서도 엉글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가족끼리 모여 술이라도 한잔 할때면 늘 엄마는 "술 좀 고마 묵으라. 내사 마 술 마시는거보이 엉글난다마. 판 접으라."라고 하였다.


오늘도 술에 '엉글난' 엄마를 달래느라 오빠는 애교를 장착하고 웃음을 탑재하여 엄마 어깨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엉글난다: 지긋지긋하다, 몸서리쳐진다. 와 비슷한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



-히마리

학창시절 결석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절대 해서는 안되는 일 중 하나였다. 무슨 역병이 걸리거나 죽을 병이 아닌 다음에야 일단 학교는 가고 볼일이었다. 감기 기운이나 몸살기운이 있어도 아버지는 "밥 든든히 묵고 학교 갔다온나. 정 못 견디겠거덩 양호실서 좀 누워있어도 된다아이가"라고 말씀하셨다. 학교를 빼먹는다는 것, 우리집에서는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튼 덕분에 우리집 4남매는 모두 국민학교 6년 개근상을 받았다. 


중학교였는지 고등학교였는지 아무튼 몸이 안좋았던 어느 날이었다. 몸이 안좋았지만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규칙때문에 나는 학교는 가야했다. 7교시 수업에 맞는 교과서와 공책과 필통 등등을 쑤셔넣었고 책보다 더 중요한, 오빠때부터 물려받아 도금 색마저 다 날라가버린 양은 도시락과 플라스틱 반찬통까지 가방에 고이 챙겨넣고서 제법 묵직해진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메고 도보 20분이 휠씬 넘는 등교길을 걸어갔다. 잘 아프지않는 체질이었다. 월요일 아침조회 시간에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이 30분이 넘어가면 하나 둘씩 픽픽 쓰러지는 수선화같은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있었는데 나는 학창 시절 단 한번도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없는 튼튼이 체질, 언년이 체질이었다. 그래서 뙤약볕에 한번도 쓰러지지 않는 나의 강인함을 원망하기도 했ㄲ고 연약한 친구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나도 가뭄에 콩 나듯 일년에 한 두번 정도 아플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픈 경우가 자주 없다보니 아픈 표시는 내는 것도 서툴렀고 그러다보니 내가 아픈것을 주위 사람들이 알아채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날도 무거운 가방을 들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옮겨 교실로 겨우 겨우 들어섰다. 아마도 창백한 얼굴에 어깨도 축 쳐져있었나 보다.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털썩 앉는 나를 보고 짝지가 내 어깨를 툭 치며 한마디를 했다. 

"야, 니 아침부터 와이리 히마리가 없노? 사흘 피죽도 못 얻어묵은 사람맹키로. 아침밥 안뭇나?"

"내가 히마리가 음서 보이나? 와 어떤데?"

"얼굴이 허연게 비실비실 해보인다. 아침조회때 딱 쓰러지는 사람같다야~"


몸은 힘들고 책상에 금방이라도 엎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친구가 말한 '얼굴이 허옇고 비실비실해 보인다'는 말이 듣기가 좋았다. 뭔가 청순가련한 청춘 드라마의 여자주인공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맨날 씩씩해서는 한번도 연약해보이거나 창백해보인적이 없었기때문이다. 몸이 아프면서도 보호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은 기분을 즐기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날 하루는 친구들로부터 과도한 관심을 받으며 창백한 날을 보냈다. 그런데 고작 하루뿐이었다. 약 먹고 자고 일어나니 언제 그랬냐는듯 다시 활기찬 나로 돌아와 있었다. 참, 나는 꽃님이 할 팔자는 아니었나보다. 그때나 지금이나!


*히마리: 힘이 없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 <힘+아리>가 변형된 형태로 히마리라고 한다. 하지만 나와 내 주변은 실제 생활에선 다들 히바리라고 했다. 히마리가 발음하다 보니 융통성있게 변화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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