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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un 17. 2022

조지 오웰 - <동물농장>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다닐 때에 좋아하던 만화영화가 있었다. 제목은 <똘이 장군>

<똘이 장군>에서 똘이는 태권도를 아주 잘하는 어린 소년이었다. 너무 오랜 세월 탓에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지금도 머리에 또렷이 남아있는 한 장면은 <똘이 장군>의 마지막 장면이다.


우리의 똘이가 북한의 괴뢰 수괴를 기염을 토하는 발차기로 일격을 가하니 망토를 두른 북한의 괴뢰가 이리저리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쓰러진 괴뢰 수괴의 몸 위로 망토가 덮이고 뚱뚱한 수괴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바닥에 깔려 있는 망토 속에서 갑자기 돼지 새끼 한 마리가 꿀꿀거리며 튀어나오더니 멀리 도망가 버렸다!


나는 <똘이 장군>을 보고 북한의 괴뢰 수괴가 정말 돼지라고 생각했다. 똘이가 시원한 발차기를 가할 때 속이 다 후련했고 돼지를 수령으로 모시고 있는 북한 주민들이 너무나 불쌍했고 가여웠다.



동물농장을 읽고 보니 똘이 장군 속 북한의 수괴가 왜 돼지였는지 알겠다. 만화는 동물농장 속 수퇘지 나폴레옹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 확실하다.


<동물농장>은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4년에 완성한 소설이다. 소설은 소련을 동물농장으로 의인화하고 스탈린을 돼지로 상징화한 소설이다. 소설을 끝내고 출판을 하려고 할 때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은 독일에 맞서 싸우는 중요한 국가 중 하나였기에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 어느 출판사도 <동물농장>을 출판하려 하지 않았다. 1년이 지나고 전쟁이 끝날 즈음에야 <동물농장>은 겨우 세상에 선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물농장>은 출간이 되자마자 공산주의에 극렬히 반대하는 소설이라고 하여 미국과 영국 정부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동물농장>이 전 세계에서 영어 외에 다른 언어로 출판된 첫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일본이 패망한 직후 미국은 우리나라에서 어떤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전 국민의 75% 정도가 사회주의 성향이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에 놀란 미국은 정보부의 은밀한 조력으로 <동물농장>을 한국어로 번역, 한국에 출판을 하게 되었다. 이 책이 영국에서 출간된 게 1945년 8월인데 1945년 그 해에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다고 하니 미국의 절박한 심정이 느껴진다.



동물농장의 줄거리는 공산주의 사상을 창시한 마르크스의 등장부터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그리고 스탈린의 독재와 그로 인한 인민들의 피폐해지는 일상의 과정을 고스란히 그렸다. 소설 속 주요 등장인물과 역사 속의 실제 인물을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존즈(사람)  →   니콜라스 2세 황제
메이저(돼지)    → 마르크스
나폴레옹(수퇘지) → 스탈린
스노볼(돼지) → 트로츠키
돼지들 → 볼셰비키 당
복서/클로버(말)→프롤레타리아 민중
벤자민(당나귀)→나이 든 프롤레타리아
동물반란 → 러시아 혁명
몰리(말) → 러시아 백군
스퀄러(돼지) → 프라우다 (소련 당 기관지)
개들 → 비밀경찰
오리들/양들 → 선전대
필킹턴(이웃 농장주, 사람) → 영국
프레데릭(이웃 농장주, 사람) → 독일


동물농장 속 동물들이 인간을 쫓아내고 다 같이 모여 정한 일곱 계명을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은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였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고 두 발로 걷는 인간은 나쁘며 네 발로 걷는 동물은 인간처럼 하면 안 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 동물들의 약속이었다.


반란의 성공으로 존즈 씨의 메이저 농장은 동물농장이 되었다. 동물들은 억압과 착취는 사라지고 자유를 얻었다. 이제 노동은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물들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니 노동도 즐거웠다.


세월이 흘렀다. 몇 년 세월이 흐른 동물농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더 열심히 할게.라는 모토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만 한 복서는 죽었다. 나폴레옹의 말에 한 마디라도 토를 달았던 암탉과 말과 암소들은 재판에서 처형당했다. 노동은 더 심해졌고 분배는 더 작아졌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스퀄러는 다른 동물들이 알지도 못하는 숫자를 들이밀며 존즈 시대보다 더 살기가 나아졌다고 더 열심히 일하면 더 나은 세상이 온다는 말을 반복했다.


클로버와 벤자민과 다른 몇몇 동물들은 농장이 바라다보이는 언덕을 내려다보면서 여러 해 전 동물들이 인간을 뒤집어엎기로 했을 때 일이 이 지경이 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궁금했다. 왜 일이 이렇게까지 되어버렸을까?



동물농장에서 글을 아는 유일한 족속은 돼지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지도자 역할을 도맡게 된 거다. 다른 동물들은 반란을 주도한 돼지들을 믿었다. 돼지들이 글자를 가르쳤지만 끝까지 배우지 않았다. 돼지들이 계명을 멋대로 고치고 기록을 위조해도 동물들은 알 길이 없었다. 동물들은 지도자를 너무 믿었고 스스로 배우지 않았으며 지도자를 감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깨어있지 않았다.


당나귀 벤자민은 글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돼지들이 규칙을 바꿀  때, 계명이 이상하게 바뀌었을 때 나서지 않았다. 

'난 너무 오래 살았어. 반란도 돼지도 별다를 것 없어. 난 간섭하지 않겠어'

벤자민은 동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도 그저 침묵으로 지켜보기만 했다.

벤자민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오래 산 선배로 어른으로서 참견하고 가르치고 일깨워주어야 했다. 그게 오래 산 동물들의 의무이고 역할이다. 벤자민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다.


처음 암소들에게서 우유를 짜서 잉여 우유가 생겼을 때 그 우유를 돼지들이 독차지했을 때 동물들은 합심해서 할 말을 했어야 했다. 처음에 뭔가가 잘못되었을 때 말을 해서 돼지들을 저지시켰다면 돼지 나폴레옹은 달걀도 목재를 판 돈도 존즈 저택의 위스키와 맥주도 혼자 독차지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거다. 이것은 확실하다. 처음이 어렵지 처음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는 건 너무 쉽다. 융통성과 인정은 모든 데 다 필요한 건 아니다.


스노볼이 나폴레옹과 대립할 때, 동물들이 뭔가 저항의 말을 하려고 할 때 그때마다 툭 튀어나와서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연신 짖어대어 토론과 의견을 반대한 양 떼들을 향해 그만두라고, 우리가 할 말이 있다고, 왜 엉뚱한 말로 여론을 호도하냐고 이야기했어야 했다. 양 떼가 지껄이게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는 거였다.


이 모든 것들을 그대로 관망하고 아무도 나서지 않은 탓에 동물들은 같이 카드게임을 하고 있는 돼지들과 인간들을 보면서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분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소련과 공산주의만을 겨냥해서 쓴 소설이 아니다. 소련도 붕괴되고 공산주의가 소멸한 마당이지만 <동물농장>은 여전히 현재에도 유효하다. 왜?

세계 곳곳에 독재는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나 김일성처럼 분명한 독재가 아니지만 민주의 가면을 쓴 독재와 기만과 술수가 판을 치고 있다.


우리는 매일 양 떼와 같은 언론을 보고 있다. 근거도 없는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주장을 외치고 있다. 토론과 이견을 방해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호도한다. 행복한 자유를 위해서 양 떼를 제거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 어렵다고 귀찮다고 다음에 내일이라고 하지 말고 지금 배워야 한다. 스퀄러가 계명을 밤에 몰래 바꿔쓰면 바로 알아채야 한다.


나폴레옹이 가짜 민주와 허위 자유로 동물들을 기만하거나 잉여물을 속여 몰래 빼돌릴 때 우리는 그때를 알아채야 한다. 저 정도야  뭐.라든지 저 자리면 그럴 수도 있지.는 절대 안 된다. 나폴레옹이 반란으로 인간을 축출했듯이 그도 착취와 억압과 기만이 난무하면 축출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작은 하나하나의 노력이 큰 움직임이된다. 그때 동물농장은 메이저 농장이 아닌 온전한 동물농장으로 자유와 행복을 민주적으로 공정하게 누릴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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