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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ul 26. 2022

알베르 카뮈 - <이방인>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 불과 한 달 전 매일매일 블로그 글쓰기를 할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글 쓰는 것 정도는 누워서 떡 먹기일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매일매일 글쓰기를 끝내고 일주일에 한 번 글쓰기 플랫폼에 글쓰기를 하자고 맘먹었는데 이게 글쎄 맘먹은대로 되지 않는 거다!

잠깐만 쉬자, 했던 것이 일주일 쉬고 보름을 쉬었더니 다시 블로그를 커고 있자니 빈 화면을 글로써 채우는 게 참 부담스럽다. 애먼 여름 날씨 탓을 해보기는 하는데, 그래봤자 누워서 침 뱉기!


지난달 건너뛰었던 독서모임을 이번 달에 2번 가졌다. 그 덕에 책이라도 읽고 이렇게 쉬었던 글쓰기를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이번에 모임에서 다루었던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이방인'은 카뮈가 1942년에 쓴 책으로 2차 세계대전 중인 당시 프랑스와 유럽 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가져왔고 카뮈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아주 혁혁한 영향을 준 책이다.

'이방인'은 문학사적 영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인가도 있어서 프랑스에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 카뮈의 '이방인'이라고 하니 평단과 대중 모두로부터 좋은 평을 받은 책이라고 하겠다.



책뿐만 아니라 카뮈라는 한 개인의 서사만 보더라도 참으로 매력적으로 굴곡 있는 삶을 살았다. 왜 카뮈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없는지 의아할 정도이다.

잘 생긴 외모와 불우한 어린 시절, 프랑스인이지만 알제에서 지낸 이방인적인 삶, 우수한 성적, 좋은 머리, 쟝 그르니에와 같은 인물과의 절묘한 인연, 절친 장 폴 사르트르와의 철학적 다툼, 2차대전 하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 저항 언론의 기자 활동, 젊은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음... 등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낸 한 인간이 펴낸 책 역시 파란만장해서 '이방인'을 비롯, 코로나 시대를 맞아 다시 재조명된 '페스트', 실존주의 철학을 제대로 담아낸 수필 '시지프의 신화', 카뮈가 생각한 삶의 방식을 풀어낸 '반항하는 인간' 등 펴낸 책마다 문제작이 아닌 것이 없다. 이번에 '이방인'을 읽어보니 그의 사상과 철학이 못내 궁금해져서 소설뿐 아니라 그의 수필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다. 과연 연내에 할 수 있을 것인가? 기대하시라~~~~



'이방인'은 겨우 135페이지짜리 아주 짧은 소설이다. 거짓말 좀 보태서 책의 첫 문장을 읽고 멈추지 않는다면 4시간 만에 독파할 수 있는 분량의 소설이다. 물론 책을 이해했냐, 못했냐와는 별개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9쪽, 민음사

아주 유명한 첫 문장이다. 첫 문장이 유명한 책이 몇몇 있다.


내 이름을 이슈마엘이라고 해두자
모비딕, 허먼 멜빌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


재산 깨나 있는 독신 여자에게 반드시 남편이 필요하다는 것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진리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이외에도 여러 첫 문장이 유명한 책들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이방인'의 첫 문장은 특히나 더 압권이라 평가되고 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이 첫 문장에 카뮈가 얘기하고픈 실존주의와 모든 것에 태연하고 과거나 미래 따위보다는 오로지 현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매우 간단하다.

뫼르소는 노환으로 요양원에서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다. 평소 엄마를 요양원에 보냈다는 것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던 뫼르소는 엄마의 장례식 날에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엄마의 죽음보다 태양빛이 그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일상으로 돌아온 뫼르소. 애인 마리와 사랑을 나누고 친구 레몽과 파티를 즐기는데 어느 바닷가에서 부딪힌 아랍인과 어떤 다툼이 있고 그날 엄마의 장례식보다 더 눈부시고 뜨거운 태양빛은 바닷가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아랍인에게 총을 겨누고 살인을 하게 되었다.


이후 재판을 받는 뫼르소. 하지만 재판은 어느덧 살인에 대한 재판이 아니라 뫼르소가 엄마를 요양원에 버리고 장례식에 충분히 애도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재판이 이뤄진다. 변호사도, 검사도, 재판관도 모두 살인보다는 뫼르소의 불효와 비애도를 탓한다. 지리멸렬한 재판으로 뫼르소는 결국 사형을 언도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며 소설을 끝이 난다.



'이방인'은 줄거리가 중요한 소설은 아니다. 거의 모든 고전들이 그러하듯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얼마나 획기적인지, 얼마나 문제적인지가 관건인데 이 작품은 이 모든 것이 다 내포되어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지금의 관점으로 보아도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인 면모가 있다. 연인 마리가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을 하자고 하는데도 그는 마리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결혼을 해줄 수 있다고 한다. 뫼르소에게는 사랑이나 결혼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게 뫼르소의 생각이다. 회사 사장이 승진을 권유해도 뫼르소는 중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승진과 파리에서의 근무를 거절한다. 남들은 욕하는 레몽을 딱히 그가 뫼르소에게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다는 이유로 그에게 친절하다. 엄마가 죽었지만 슬픔보다 햇빛의 따가움과 숨 막힘이 그에게는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바닷가의 내리쬐는 햇볕과 아랍인의 칼에 반사된 태양빛의 따가움이 뫼르소에게 방아쇠를 당기게 하였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가?


뫼르소의 이런 성격은 재판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반성하는 듯한 눈빛과 말 한마디면 가벼운 형을 받을 수도 있었던 것을 그는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엄마와 장례식이 재판의 화두가 되는지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그의 태도는 심지어 변호사마저 그를 변호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 어설픈 변호를 하면서 검사의 어긋한 재판심리와 재판관의 종교적 가치와 맞물려 어처구니없게도 엄마의 장례식에서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뫼르소는 사형집행을 기다리면서 슬퍼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대중들이 자신의 사형장에 와서 축하의 함성을 소리쳐주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엄마의 자연사에서 뫼르소의 햇빛 살인까지가 1부, 재판 과정이 2부로 되어있다.

1부는 카뮈의 실존주의적인 가치가 뫼르소의 삶의 태도와 생각으로 담겨 있는 듯하고, 2부는 당시 세계가 보여준 부조리를 재판 과정을 통해 카뮈는 낱낱이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부조리는 카뮈로 대표되는 194~50년대 문학의 대표 사조였다.

부조리란, 황당하다 허무하다 애초 의도와 딴판인 결과가 나온다 아무런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카뮈가 파악하는 인간은 합리적 질서를 원하고 삶과 세계에 대한 이유와 목적과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세계는 의미도 없고 목적도 없다. 지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돌아가고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아니며 단지 우연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우연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무엇이든 이유와 논리와 목적을 찾고 싶어 한다. 이렇듯 인간이 찾으려는 의미와 합리가 세계가 근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우연성이 부조리하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런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의 세 가지 방식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는 자살하는 방법이다. 합리적인 인간에게 세상은 그렇지 않으니 삶이  과연 가치가 있는가? 가치가 없다면 그냥 죽는 것이 그 대안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것인데 카뮈가 얘기하는 희망이란 현실의 세계가 아닌 피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세상이 아닌 저세상을 추구하자는 것인데 카뮈는 이 방법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반항하는 것이다. 자살도 피안의 세계로 피하는 것도 현명은 방법은 아닌데, 그러면 자살도 피안의 세계도 대안이 아니라면 현실의 세계에서 부조리한 세상에 반항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카뮈가 추구하고 따랐던 삶의 방법은 이 세 번째인 반항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다.


카뮈는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했건만, '이방인'이라는 작품 속 2부 재판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뫼르소는 반항은커녕 자기가 죽어나갈 지경인데도 제대로 된 항변 한번 하지 않으며 그저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이러거나 저러거나 자기에게는 마찬가지라며 마치 타인의 재판을 관람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준다.


카뮈는 '이방인'에서 세상의 부조리함을 보여주려고 했지만 아직 인간의 반항하는 모습까지 그리기에는 세상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무려 80년 전에 쓰인 소설인데도 모든 고전이 그러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생각할 화두를 던지고 있다.

부조리는 2차대전이 일어나고 있었던 카뮈의 시대에도 있었지만, 2022년 7월 대한민국에서도 더 많은 부조리한 현실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니, 과연 부조리한 것이 맞을까? 황당하고 예상과는 다르고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것이 부조리라면 나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부조리한 사회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쩌면 많은 이들이 예견하였고 그 예견한 모습대로 흘러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현재 우리 사회는 부조리한 것이 아니라 잘못될지 뻔히 알고서도 선택을 한 우리 탓(솔직히 말하면 그들 탓)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부조리가 아니라 사람의 부조리가 원인이지 싶다.

카뮈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세 가지 제시하였는데 부조리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은 누구에게 물어볼까? 이런 고민을 하기엔 나도 많이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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