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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pr 30. 2023

루리 - <긴긴밤>

나에게는 이름이 없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름을 갖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준 것은 아버지들이었다. 나는 아버지들이 많았다. 나의 아버지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루리 작가의 '긴긴밤'은 겨우 125페이지짜리 짧은 동화이다.

그마저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일러스트 그림이 30페이지가 훌쩍 넘어가기 때문에 글로 채워진 페이지는 100페이지가 채 안 된다. 한번 손에 잡으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한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책이다.


한 시간 안에 독파할 수 있는 동화책이라고 해서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된다.

쉽게 씌여진, 짧은 이야기 안에는 '나'를 찾아가기 위한 수많은 여정과 질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한, 같이 독서 모임을 하고 있는 친구가 말하길, 세상의 모든 예술은 두 가지를 말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다. 하나는 사랑이고, 또 하나는 '자아 찾기'라고 했다.


친구가 생각해서 만든 말인지, 그도 누군가에게서 들은 말인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적어도 내가 접한 책과, 영화와, 연극들은 거의 모두가 사랑과 자아를 말하고 있었던 듯하다.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나의 해방일지'에서 염창희가 주구장창 이야기하더니, 내 '끼리'인 그 친구는 배운 사람이고 나 역시 배운 사람이라는 증명이 성립될지어다.


'자아 찾기'에는 어떤 공식이 있다.

첫째, 집을 떠나야 한다.

둘째, 온갖 고생을 해야 한다.

셋째, 반드시 집으로(혹은 사랑하는 이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스신화의 오딧세이아도 독일의 헨젤과 그레텔고 집 떠나 개고생하다 집으로 돌아갔다. 가까이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무리도 무언가를 찾아 길을 떠나 개고생을 했고, 우리나라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홍길동이도 집을 떠나 온갖 고생과 모험을 하다가 급기야 나라까지 세우기도 하였다.


'긴긴밤'에서 집 떠나는 고생을 하는 건 흰코뿔소 노든과, 까만 점이 있는 정상적이지 않은 알 양동이를 든 펭귄 치쿠와 그 알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펭귄, 이 세 동물들이다.


"여기, 우리 앞에 훌륭한 한 마리의 코끼리가 있네. 하지만 그는 코뿔소이기도 하지. 훌륭한 코끼리가 되었으니, 이제 훌륭한 코뿔소가 되는 일만 남았군그래."


코끼리와 함께 했던 코뿔소 노든은 제대로 된 코뿔소가 되기 위해 길을 떠났다. 코뿔소가 되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내와 딸을 잃었고, 동물원에 갇혀 폭격을 맞기도 했으며, 그 폭격으로 절친한 친구 앙가부를 잃었다. 노든은 복수를 위해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펭귄 알을 부화하기 위해 스스로 책임을 맡은 치쿠라는 펭귄과 함께였다.


노든과 치쿠는 알을 위해 바다를 향해 걸었다. 사막을 지나고 풀숲을 지나면서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치쿠는 너무도 힘들었다. 부리에는 알을 잘 부화시키기 위해 알 양동이를 꼭 문 채, 윔보와의 약속을 위해 어른 펭귄으로서 알 펭귄을 탄생시키기 위해 맡은 바 막중한 책임을 다했다.

치쿠는 다음 세대 펭귄을 위해 책임을 끝까지 다하며 자신을 희생했다.


지금 우리는 펭귄 치쿠만도 못한 어른들 천지인 세상에 있다.

치쿠는 자신의 희생으로 알 펭귄을 탄생시켰는데, 사람 세상에는 요구하고 강요하고 가르치는 어른 사람이 가득하다. 치쿠의 죽음에 묵직한 무언가가 치밀어 올라왔다.


코뿔소가 되기 위해 그리고 복수를 위해 길을 떠났던 노든은 자신의 목적은 잠시 잊고 갓 태어난 어린 펭귄을 바다로 데려다주기로 하고 둘은 바다로 가는 길을 향해 여행을 계속했다.

바다는 너무 멀었고 둘은 바다로 가는 길도 몰랐다.

바다로 가는 길에 둘은 수없이 많은 '긴긴밤'을 만났다.

여러 '긴긴밤'동안, 둘은 도망치기도 하고, 서로 보듬어 주기도 했으며, 밤새 이야기하기도 했다.


'나'를 찾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긴긴밤'은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많은 '긴긴밤' 속에서, 노든을 잃을 것이 두려워 코뿔소로 살 테니 같이 있자고 말하는 어린 펭귄에게 노든은 어린 시절 코끼리 할머니가 했던 그 말을 어린 펭귄에게 말했다.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코뿔소로 태어나 펭귄으로 자란 어린 펭귄은, 어느 날 노든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순탄했던 코끼리 고아원을 떠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고. 그때 노든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로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일들 중 하나야."


떠나본 사람만이 후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떠나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떠나본 사람이 '자아'를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떠나보지 않은 사람이 '자아'를 찾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말할 자신이 없는 나는,

떠나본 사람인가, 떠날 사람인가

돌아온 사람일까, 돌아갈 사람일까


한번 읽었을 때보다

두 번 읽은 지금이 더 머리에 생각이 많아졌다.

세 번 읽으면 어떻게 될까?

네 번쯤 읽어도 되지 않을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책장 속 어린 왕자처럼, 두고두고 보고 싶어졌다.


내일 주문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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