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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May 20. 2023

아버지에 대한  단상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2022년 한 해 내내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소설을 해가 바뀌고서야 읽었다.

2022년에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히트를 쳤는데, 왠지 모르게 소설의 제목이 드라마를 아류한 것 같아서 책이 보기가 싫었다.


사무실 내 옆자리에는 청춘을 민중해방과 노동해방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586 아저씨가 앉아 있다. 어느 날 586 아저씨가 내게 물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읽어봤소?"

"아니오."

"어, 참 재밌소. 한번 읽어 보시오. 빨치산이 나오는 이야기거든. 그대도 그런 이야기 좋아할 것 같아서."


읽어보고 싶지만, 사기는 싫고 도서관에서는 항상 대출 중이고, 예약도 안되더라고 말을 하니, 586 아저씨는 자기는 책을 샀으니 빌려주겠다고 하였다. 다음 날, 내 책상에 '아버지의 해방일지'가 놓여 있었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는 (소설은 자전적 이야기임이 틀림이 없고 소설 속 아버지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임이 틀림이 없다.) 구례 백운산에서 사 년간 빨치산이었다. 수많은 동지들을 산에서 잃고 자신도 빨갱이 딱지를 쓰고 감옥 생활을 하였고 출소하여서도 사는 동안 내내 감시와 속박의 굴레 어린 삶을 살았다.


빨갱이 '아버지'때문에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조카는 육사에도 입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는 원수가 되었고 말을 섞지 않았다. 그래도 감시와 구속의 삶이었지만, '아버지'는 사람 노릇을 하며 살았다. 민중의 삶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이웃의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아무도 모르게, 도움받은 사람만이 아는 방식으로. 마을의 일에도 먼저 나서고 제일 앞에서 일을 처리했다. '어디선가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홍반장'처럼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의 이런 홍반장 같은 삶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딸은 목격하게 된다.

3일간의 장례 기간 동안 숱한 인연들이 오고 가고 그들이 건네는 말속에서 주인공은 "내가 모르는 아버지"를 알게 되었다.

270페이지의 소설은 대부분이 장례식장의 풍경이다.


소설은 손에 잡은 지 이틀 만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책만 온전히 읽은 게 아니라 내 할 일을 하고 나서 자투리 시간에만 읽었는데도 그러하였다. 그만큼 재미가 있고 가독성이 있다는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막 덮었을 땐 감정이 벅차올라 할 말도 많고 쓸 것도 많았던 것 같은데, 며칠이 지나고 벅차올랐던 감정도 다 식어버리니, 내가 어떤 감정과 생각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현대사가 어쩌고, 작가가 어떻고, 인생사가 저쩌고, 뭐 그랬던 것 같은데 그것들을 억지로 끄집어 낼 수가 없다.


책을 덮고도 남아있는 감상은 '우리 아버지'였다.

우리 아버지는 12년 전에 돌아가셨다. 아지 나이 81였다. 아쉽지만 여한은 없는 나이이리라.


전통식을 고집하는 엄마 덕에 우리는 검은 양복에 검은 치마저고리가 아니라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 삼베 두건에 띠까지 둘렀다.


책 속의 빨치산 고상욱씨처럼 우리 아버지도 경상도 어느 고장에서 70년 가까이 살았으므로 장례식장은 아버지 지인, 엄마 지인, 언니 오빠 지인, 친척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살아생전 완고하고 다정하지 못한 성격으로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풍성한 장례식 풍경을 보면 아버지는 나름 잘 살았던 인생인 듯했다.


자녀에겐 더욱 엄격해서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들은 기억이 잘 생각나지 않고 운전기사 특유의 곤조가 더 많이 아버지에 대한 인상으로 남아있던 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살아계실 때 나와 접점이 될만한 별 추억도 가지지 못했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하나의 통과의례로 다가왔었다.


우리는 '엄마'라는 단어에 묘한 가슴 뜨거움과 미안함을 주로 가지곤 한다. 특히 당신들이 살아계시고 이벤트가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엄마는 일상이고 평소의 무엇이다.


아버지는 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흘렀다. 희한한 게 아버지가 죽고 세월이 갈수록 자꾸 아버지 생각이 난다. 그때 아버지가 이랬지, 우리 아버지는 안 그랬는데, 이건 울 아버지가 좋아하던 건데, 울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등등


우리 남매들이 모이면 아버지 살아계실 때보다 더 많이 아버지 이야기를 한다.


완고하고 뻣뻣하고 자기표현에 인색했던 아버지, 돌아가시고 세월이 흐르니 그 빈자리가 더 커 보이고, 그때 당신이 왜 그랬는지 그럴 수밖에 없던 현실과 부담이 차츰 이해되었다.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할 말은 하던 엄마와 다른 아버지의 심정이 세월이 우리를 농익게 하니 그제야 비로소 조금씩 보이는 것이다.


엄마라는 건 듣기만 해도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즉각적인 애틋한 사랑이라면, 아버지는 처음엔 덤덤했다가 나중에 가슴이 묵직해지는 미안함이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부성애를 드러내지 못했고 우리는 아버지에게 부모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다.

덤덤했던 마음이 그의 죽음과 죽음 후 자식들이 나누는 추억 속에 누그러지고 화기애애해진다.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읽는 내내 그런 우리 아버지를 떠올리게 해주었고 아버지의 3일장을 소환시켜주었다. 행복했고 따뜻했다.


아버지가 그리울 때 다시 보고 싶은 책이었다. 살아계실 때 한 번도 해드리지 못한 말, 뒤늦게 책을 핑계 삼아 해본다.


아버지 욕보셨어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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