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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ug 19. 2024

박서련 - <체공녀 강주룡>

지인에게 재미있는 요즘 소설을 추천해달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체공녀 강주룡>을 추천해 주었다. 내가 역사를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니 딱 취향에 맞을 거라고 하면서.

표지 속 강주룡은 무섭게 생겼다. 왜 표지를 이따위로 만들었을까. 지인의 추천이 아니었다면 표지를 보고는 이 책을 고르지 않았을 거다.


<체공녀 강주룡>은 2018년 제 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고 한겨레출판에서 펴낸 소설책이다. '체공녀(滯空女)'라는 말은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공중에 갇힌 여자'라는 뜻이다. 소설에서는 1931년 평양 을밀대에 올라 임금 투쟁 노동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을 일컫는 말로 당시 신문과 언론에서 실제로 쓰이던 말이다. 고공농성이라는 상황과 단어가 없던 시절 높은 곳에 올라가 스스로 갇혀 농성을 벌이는 모습을 당시 기자들은 '체공'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나 보다.


강주룡에 대하여 찾아 보았다. 몇 가지가 검색이 되었다. 그중 우리역사넷에 1931년 7월 5일자 '동광'이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가 눈에 띠였다. '동광'에는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 올라가 있다가 새벽에 그를 발견한 산보하던 사람들을 향해 하던 연설문이 실려 있었다. 강주룡이 고무공장 49명의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것은 그들의 삭감이 2,300명 평양 전체 고무공장 노동자의 임금 삭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임금 삭감을 취소하기 전에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고, '동광'은 쓰고 있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이어 강주룡은 자신이 살아온 길을 이야기했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14살에 서간도에 이주했고 20살에 다섯 살 어린 신랑 최전빈과 혼인했다. 독립운동 하겠다는 남편을 따라 백광운이라는 사람이 지휘하는 독립운동 단체에 가담하였으나 남편이 죽고 다시 시집으로 돌아왔다. '남편 잡아 죽인 년'이라는 오명을 쓰고 일주일을 감옥에서 지낸 후 친정으로 갔다. 살길이 막막한 친정 식구들과 평양으로 돌아왔고 주룡 자신이 가장이 되어 고무 공장에 다니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고무 공장에 다니던 중 임금 삭감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고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해 공장을 점령하고 임금 삭감 반대 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경찰이 들이닥쳐 공장 점령 투쟁을 하던 노동자들은 강제로 쫓겨나게 되고 참다못한 강주룡은 을밀대에 올라 사람들이 모이면 평원 공장의 횡포를 알리고 속시원히 죽자고 마음 먹었다.


박서련 작가는 '동광' 잡지에서 언급한 열 줄 언저리쯤 되는 강주룡의 일생을 작가의 상상력을 더하여 한 편의 소설로 만들었다. <체공녀 강주룡>에는 독립 운동의 역사가 있고 여성 운동이 있다.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배합하여 탁월한 서사 구조를 만든 작가의 역량은 한겨레문학상을 타고도 남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말하자면 이 소설은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웬만한 역사 소설을 좋아하는데 <체공녀 강주룡>에는 긴장감보다는 약간 졸리운 듯한 느낌이 있었다. 강력한 스포일러인 역사라는 사실을 이미 아는 것과는 별개의 느낌이다. 문체가 그저 아주 담담해서일까. 대화체와 단순 문장이 구별이 되지 않는 편집때문일까.


소설을 배우려고 소설 쓰기 수업을 듣는데, 선생님한테 물었다. 요즘 소설에는 왜 따옴표를 쓰지 않냐고.

선생님은 말했다. '따옴표 없어진 지 이삼 십년 된 것 같아요.' 그 뒤의 이어지는 다른 이의 말때문에 소설 쓰기 수업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한국 현대 소설에서 따옴표를 본 기억이 거의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럴까. 따옴표를 쓰면 촌스럽다고 여겨지는 게 요즘 풍조인가.


나는 주로 고전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다. 확실히 고전 소설의 문체와 현대 한국 문학의 문체는 많이 다르다. 나는 고전 문체에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체공녀 강주룡>의 소재는 신선하고 흥미롭지만 작가가 풀어내는 서술 방식은 조금 지겹다고 생각된다. 소재와 역사적 사실의 박진감이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듯 맹숭맹숭해졌다. 240쪽 정도의 길지 않은 소설인데 다 읽는 데 열흘 정도나 걸렸다.


내가 책을 늦게 읽는 편이 아니냐고? 나는 최근에 읽은 <토지> 20권 중 한 권을 삼사 일만에 읽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 독자 탓은 마시길. 박서련 작가는 그러나, 문장은 침착하고 표현은 매력이 있다. 매력있는 표현은 매력있는 문체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 마시라. 내가 생각컨대, 매력있는 문장과 표현을 만드는 작가는 많지만 매력있는 표현을 읽기 좋고 흡입력있는 문체로 지속적으로 이끄는 작가는 흔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느낀 것과는 달리 어쨌든, <체공녀 강주룡>은 심사위원들의 극찬을 받았고 요즘 보기 드문 좋은 소설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현대 한국 소설의 문법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잘못일 수도 있다. 그러니 나의 작은 트집을 이 소설 전체의 감상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한다.


내 지인과 달리 나는 이 소설을 타인에게 추천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그저 '강주룡'이라는 역사적 인물을 알게 된 것으로 만족한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그를 알았겠는가.

하지만 힐링, 소통, 행복 등에 매여 있는 요즘 소설 트렌드에서 오랜만에 보는 역사적 소재의 소설이라 이 점에서는 반갑다. 사실 속 허구, 허구에서 건지는 하나의 사실, 이런 걸 좋아하는 나니까. 이런 걸 나도 써보고 싶어서 심심할 때 사실(史實)을 찾고 모으고 있다. 반어적이지만, 박서련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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