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해나 - <혼모노>를 읽고
2025년은 성해나의 시간이었다.
온 서점은 그의 책들이 제일 좋은 자리에 진열되어 있었고,
온 동네 도서관에서 그의 책은 항상 '대출 중'이었고,
대출을 위해 도서관 앱을 클릭하면 항상 '예약 중'이었다.
일 년 정도 지나면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웬걸? 성해나의 책은 일 년이 지나도 '대출 중'과 '예약 중'은 해결의 기미가 없다.
누가, 대한민국의 성인 독서량이 점차 줄고 있다고 했는가?
넘쳐나는 도파민 터지는 짧은 영상 콘텐츠의 범람 탓도 있겠지만,
성해나 소설만큼 재미있는 줄글 콘텐츠가 부족해서였던 건 아닌지,
서점과 도서관에서 일어나는 작금의 사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천천히 씹어보았다.
책의 제일 뒷면에 배우 박정민은 마지막 줄에서 이런 추천사를 남겼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혼모노>를 다 읽고 나면 박정민의 추천사가 정말 잘 쓰인 한 줄 요약 추천사임을 알게 된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은 넷플릭스를 그리워하지 않았고 책의 다음 이야기가 계속 궁금해졌으니까.
단편소설 모음집을 읽다 보면, 서로 다른 예닐곱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지만 왠지 모르게 다른 소재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명 장소도 다르고 인물도 다르고 소재도 다른데, 패턴이 비슷하거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유사하거나. 그래서 다른 예닐곱 개의 단편을 읽었음에도 이 이야기가 그 이야기 같고 그 이야기가 이 이야기 같은. 누가 봐도 이 작가가 썼을 것 같은, 그런 느낌.
작가의 특성과 개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이는 좋다고 느낄 수도 있다. 감상은 각각의 영역이고 호불호는 우위를 논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성해나의 <혼모노>는 그런 면에서 일반적인 단편소설집과는 다르다. 여기에 실린 일곱 개의 이야기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곱 명의 다른 작가가 자신의 가장 좋은 작품 한 편씩을 제출해 모아 낸 소설집이라고 해도 나는 믿었을 것이다. 그만큼 실린 이야기가 다양하고, 개성이 뚜렷하고, 하나같이 재미있다.
♠길티클럽: 호랑이 만지기
- 김곤이라는 감독의 팬인 주인공이 김곤과 동물원의 호랑이를 통해 깨닫는 죄책감과 쾌감에 대한 이야기
♠스무드
-한국을 전혀 모르는 한국계 미국인 듀이가 자신이 일하는 미술가 듀이의 작품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고 종로와 광화문에서 태극기부대를 만나 환대를 받는 이야기
♠혼모노
-30년 된 박수무당 집 앞에 갓 신이 내린 고등학생 신애기가 이사 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신애기에게 들린 신은 박수무당에게 머물던 같은 귀신, 장수할멈. 어떻게 하든 신빨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박수무당의 '진짜(혼모노)'를 찾는 이야기
♠구의 집: 갈월동 98번지
-할 일이 많은 스승 여재화가 제자 중에서 가장 무난해 보이는 구보승에게 갈월동 98번지에 '경동수련원'-아마도 남영동에 지하고문실이 있는 건물-의 설계를 맡기면서 일어나는 보승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우호적 감정
-맥스라는 사장이 수평적 관계를 지향하는, 마을변화프로젝트를 주로 행하는 회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진이라는 대기업에서 스카우트된 중년의 남자와 회사 창립 멤버인 수잔, 소설의 화자 알렉스 그리고 소서리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해관계과 그 사이에서 발화되는 인간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
♠잉태기
-이혼했지만 임신을 한 서진과 서진을 가운데 두고 서로 애정 쟁탈전을 벌이는 서진의 엄마와 서진이 '지지'라고 부르는 할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그린 이야기
♠메탈
-메탈을 좋아하는 세 명의 고등학교 친구 우림, 조현, 시우가 나이가 들고 세월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는 시대에 따라 변하고 누군가는 시대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소설의 프로필을 보니 성해나는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인다.
(내 기준) 이렇게나 어린 작가가 이렇게나 많은 인물을 이렇게나 다양한 장소에서 이렇게나 다양한 소재를 갖고 마치 스스로 모든 삶을 살아본 것 같이 글을 지었다는 사실에, 엄청 놀란다.
어떤 작품의 작가의 완숙미로 나오는 것이 있고 어떤 작품은 번득이는 아이디어로, 어떤 작품의 시대의 고뇌로 나오기도 한다.
<혼모노>의 작품들은 위의 셋을 모두 다 가진 작품이라고 한다면, 내가 너무 지나친 찬사를 보내는 것일까?
일곱 개의 작품 중에서 단연 압권은 <혼모노>이다. 늙은 박수무당과 어린 신애기 무당을 오가며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를 드러내지 않고 교묘히 독자들에게 생각해 보라고 '꺼리'를 툭 던진다. '꺼리'와 함께 마치 영화 '곡성'을 보는 듯한 긴박함과 묘사는 두 시간짜리 영화 한 편을 보는 듯한 몰입감을 준다. 정말 박정민 배우 말대로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영화로 만들어도 텍스트로 읽었을 때처럼 저릿저릿한 긴장감과 박수무당에 대한 '애인함'이 느껴질까? ('애인함'은 가엾고 불쌍하고 가슴 절절한 연민, 같은 뜻으로 경상도 사투리이다. 아직 표준어에 서툰 나는 '애인하다'를 대체할 만한 표준어 단어를 찾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여운이 계속 남는 작품은 <우호적 감정>이다.
내가 수평 관계의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고, 한 때 남을 배려하며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인간관계를 맺었기 때문인지 소설 속 화자인 '알렉스'에게 깊이 동화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가장 먼저 생각한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고 '돈'과 '책임'이라는 단어가 걸리는 상황이면 더욱 그러하다.
소설에서 서로 우호적이었던 많은 관계들이 '돈'과 '책임'과 '선의'속에서 서로 속고 '선의'가 '권리'가 되고 '권리'는 '질서'가 되고 '질서'는 수평이 아닌 수직 관계를 되어 버린다.
<우호적 감정>은 한동안 잊고 살았던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는' 기억을 불러 냈다. 불편하고 께름칙했지만 지금은 그저 '추억'으로 미화되어 버린.
버릇처럼 '좋은 게 좋은 것'으로 지내려는 나에게 두 번의 과오를 또 할래?라는 작가는 묻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할지, 아니할지는 나도 계속 살아봐야 알겠다. 왜냐하면 사람은 마음먹었다고 해서 그대로 행동으로 다 옮겨지는 동물이 아님을 너무 여러 번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의 두 작품 외에도 하나같이 재미있고 몰입되고 신선한 타격감을 주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스무드>는 그저 그랬다)
이미 너무 많이 사람들이 읽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미처 못 읽은 사람이 읽다면 어서 빨리 책을 구하여 읽어보시라. 넷플릭스 보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