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 이야기

워킹맘의 프리퀄

by 홍월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고 글을 쓰려고 했던 첫 주제가 워킹맘으로 힘들게 아이를 키웠던 이야기였다. 정작 힘들게 아이를 키울 때는 나를 돌아볼 시간도 없었고 아이가 제대로 잘 크고 있는지 살펴볼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키웠다. 옛 어르신들이 하는 말처럼 '제 먹을 복은 지가 알아서 갖고 태어난다'는 말을 믿고 싶어하면서 계획과 병행없이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

영아와 유아를 거치고 아동이 되고 청소년이 되면서 그저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수준으로 충족되지 않음을 알게 되었고 그제야 비로소 육아의 어려움을 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주위에 여성으로서 직장과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나는 내가 아는 한에서는 그 분야 선구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런 세월이 지나고 아이들 둘 다 모두 성인이 되고나서야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기록해두지 못했던 육아일기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첫 주제로 <기억에 의존한 철 지난 육아일기>라는 제목의 매거진을 채워나가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는 프리퀄과 시퀄이 있다. 육아 이야기를 기억에 의존하여 쓰다보니 저절로 출산의 스토리가 연상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출산을 한 여성은 모두 다 자신의 출산 스토리가 가장 특이하고 고생스럽고 힘들다. 남자들에게는 군대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뻔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이야기! 누구에게나 뻔할 것인 그 이야기를 내 육아일기의 프리퀄로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큰 아들

12월 24일에 진통이 시작되었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아이가 태어날 것으로 생각했고 은근히 예수님과 생일이 같겠다며 태어나지도 않은 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이 그러한 것 처럼.

그러나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생각한 엄마를 각성하게 하려는 냥 아이는 무려 4일이나 진통을 하게 했다. 그동안 병원을 2번 방문했다.


"선생님, 배가 너무 아파요. 애기가 나올 것 같아요."

"어머니, 자궁문이 1센티도 안 열렸어요. 더 있다 오세요."

"아이고 선생님, 죽울 것 같아요. 제발 이제 입원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고 어머니, 아직도 1센티 밖에 안되네요. 더 있다 오세요."


이렇게나 배가 아픈데 자궁문이 1센티밖에 안 열렸다니! 아니 그러면 아이가 나오는 정도인 10센티 가량 자궁문이 열리면 배가 얼마나 더 아프다는 건지, 나는 그저 미치고 환장할 따름이었다. 밤에 진통이 10분에 한 번 정도 왔는데 (의사나 출산관련 책에서는 3~5분에 한 번은 와야 한다고 했던 것 같다) 진통이 올때마다 이를 하도 꽉 물어서 수건을 주리틀림을 당하는 죄인마냥 입 안에 물고 신음을 내지르는데 신랑이라는 작자는 어찌나 편안히 잘도 잠을 자는지, 허리만 펼 수 있었으면 아마 목을 졸라 버렸을 것이다.


견디다 못해 낮에 한번 친정 엄마를 불렀다. 애도 곧 나올 것 같아 병원에 가야겠으니 우리집에 와달라고. 집에 와서 진통을 겪는 나를 보고 친정 엄마는 "하는 거 보니 아직 애 나올때 멀었다. 네 방구석을 데굴 데굴 구를 정도가 되야되고 눈 앞에 진짜 별이 보여야 하는데 네 꼴을 보니 그 정도는 아니네. 나는 갈란다. 더 아프면 그 때 불러라."고 했는데 나는 그 순간 엄마가 계모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출근한 신랑도 없는 집에서 혼자서 데구르르하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어서 12월 27일에 병원엘 갔다.


내 자궁문은 그때로 1.5센티밖에 열리지 않았다고 했지만 진통이 오래가기는 것 같아서 그냥 입원하라고 하면서 분만 유도제를 투여하였다. 그때부터 자궁문은 본격적으로 열렸고 진통도 본격화되었다.

자궁문이 3센티정도 열릴 때까지는 집에서보다 훨씬 더 아파서 정말로 엄마가 말한 별이 보였는데 그 때부터 무통주사를 주는 바람에 그 이후로 솔직히 별로 기억이 없다. 다만, 너무 힘을 주어서 진통 중에 오른쪽 고막이 터졌다. 귀에서 피가 나고 갑자기 세상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진통 중에 진찰도 불가하고 약을 함부로 쓸 수도 없어서 배 아픈 것보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더 컸던 것 같다. (나중에 고막이 터진 것 치료하는데 두어 달 걸렸다.) 진통을 시작하고 나흘 후인 12우러 28일 늦은 오후에 3.98kg의 우람한 아들이 세상에 나왔다. 불효막심한 놈!


그런데 내가 진통하는 나흘동안 저도 배 속에서 용을 많이 썼나보다. 자기가 내 뱃속에서 배설한 분뇨를 너무 많이 삼켜서 아들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속청소를 해야했고 감염이 우려되어 병원에서 일주일동안 입원을 해야했다. (그래서 나는 드라마에서 보던 엄마와 아이의 감동스런 상봉을 하지 못했다. 적절한 조치를 하느라 병원에서 바로 아이를 옮겨야 했기때문이다.)


아이를 낳고도 귀가할 때 아이없이 혼자 귀가했어야했던 나는 기쁜 마음으로 퇴원을 하지 못해서 차에서 찔찔 울면서 집으로 왔는데 경험많은 사람들이 별 것아니라고 금방 아이도 엄마곁으로 올거라고 위로를 하는데도 아이가 잘못 될것 같고 퇴원을 못할 것 같아 나라잃을마냥 울었댔다.


하지만 역시 경험많은 분들의 말처럼 아이는 일주일 뒤 내 옆으로 왔고 그 때부터 본격적인 육아-백일동안 내내 울어제끼기, 밤에 2시간마다 깨기-를 시작하면서 아이없이 산후조리했던 일주일이 축복인 줄 알게 되었다.

<내가 출산할 무렵은 산후조리원이 막 시작될 무렵이어서 많이 가던 시기가 아니었고 그래서 나는 친정에서 삼칠일동안 산후조리를 하였다.>


둘째 딸

아이 열 명을 낳으면 열 개의 다른 경험과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내 둘째 출산경험은 첫째도 또 달랐다. 배도 아프지 않은데 자다가 기분이 좋지 않아 깨보니 양수가 먼저 터졌다. 당황하지 않고 미리 싸둔 출산가방을 점검하고 끓여둔 미역국을 먼저 푸지게 한그릇 먹었다. 큰 아이때 병원에 입원하고는 관장을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배가 고파서 힘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힘도 제대로 주고 애도 빨리 낳고 싶었다. 그래서 큰 대접에 고봉밥을 말아서 미역국밥을 막일꾼처럼 뚝딱 미시듯 먹고 여유롭게 병원에 입성하였다.


이번에도 내 예상이 틀렸다. 의사선생님은 짜증나듯이 인지 아니면 호통하듯이 인지하는 말투로 이야기했다. "어머니, 양수가 터졌으면 바로 병원에 와야죠? 자궁에 양수가 많이 빠져버렸는데 아이가 세균에 감염되면 어쩔려고 이렇게 늦게 왔어요?" 나는 또다시 '감염'이라는 단어에 갇혀서 가슴이 쿵쾅거렸다. 입원조치하고 진통이 올때마다 똥 누듯 힘을 주면서 어서 빨리 아이를 봤으면 하는 마음만 들었다.


양수는 벌써 꽤 나왔는데 아이는 밑으로 내려오지를 않으니 의사선생님도 걱정이 되는지 제왕절개를 해야할지도 모르겠으니 생각하고 있을라고 언질을 주었다. 아, 나는 제왕절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가급적이면 자연분만을 하고 싶었는데 아이에게 감염이 우려된다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시간정도만 더 보고 그래도 아이가 내려오지 않으면 수술을 할 거라고 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힘을 주었다. - 5분에 한번씩 배가 아파올때마다 힘을 주지않고는 고통을 참을 수가 없기도 했다.


그런데 뭔가 쑥~하고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조산사의 내진에서 분만실로 갈 만큼 아이가 내려왔다는 판단에 제왕절개없이 분만실로 이동하였고 마침내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똥을 먹지도 않았고 다행히 다른 감염도 없어서 드라마에서 보던 모녀 상봉을 할 수 있었다. 첫째 아이 출산 때 고막터짐과 아이의 배변삼킴으로 하지못했던 상봉을 하고 보니 내 몸에서 생명체가 나왔다는 신비하고도 신기한 느낌에 전율이 일었다.


아, 이것은 가능하다면 꼭 한번은 해보아야할 신성한 경험이었다. 간단한 뒤처리를 하고서 나는 입원실로 옮겨졌다. 별 일이 없다면 하룻밤 지나고 다음날 오후쯤 퇴원할 수 있을 것이었다. 별탈없는 자연분만이었기에.


입원실로 옮겨지고 두어 시간쯤 지났다. 나는 조금 춥다고 생각이 들었다. 막 출산이 끝나서 그려러니 했다. 곧 담당의사가 회진을 왔다. 의례적인 회진이었다. 어디 불편한 데 없느냐 물어보고 출산 후 하혈이 있으니 기저귀 잘 확인하라며 뒤를 돌아 나가려했다. 그냥 나가려던 담당의사는 나를 돌아보더니 하혈량 함 볼까요하더니 간호사를 통하여 기저귀를 확인하였다. "어, 히혈을 너무 많이 했는데. 어서 빨리 응급실로 옮기세요!" 이 말이 떨어지자 마자 모든 것이 후다닥 진행되었다.


나는 들것에 실려 다시 1층 응급실로 옮겨졌다. 병원의 거의 모든 간호사들이 응급실로 투입되었다. 차고 있던 기저귀를 빼자마자 자궁과 질을 통하여 피덩어리가 땅바닥에 퍽하고 쏟아졌다. 응급실 바닥은 온통 피칠갑이 되었다. 나는 그때부터 한겨울에 옷하나 걸치지 않고 강가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추위에 온 몸을 떨었다. 추워서 죽을 것 같았다. "추워요. 너무 추워요." 말이 떨어지자 마자 예닐곱개의 핫 팩이 내 양 겨드랑이와 목 뒤와 가슴에 대어 졌다.


"B형 혈액이요!" 말과 동시에 수혈이 시작되었다. 드라마에서 보던 기계장치가 내 옆에 오고 "혈압이 떨어집니다." "손으로 짜서 피를 짜 넣으세요." 같은 말들이 오고 갔다. 의사는 내 배를 만지고 뭔가를 하더니 "자궁을 적출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피가 안 멎으면 자궁을 들어내야겠습니다."고 말했다. 의사는 남편에게 가서 자궁 적출에 대한 설명을 하고 동의서에 사인까지 받았다. 죽을 수도 있다는데 그깟 자궁따위,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생리를 안해도 되니 더 좋은 것 아닌가하는 철없는 생각도 했더랬다.) 급기야 병원의 원장까지 내려오고 시끌벅적하더니 뭔가 조치가 되는 듯 했고 그러더니 하혈이 멈추는 것 같았다. 추위를 덜 느끼는 것으로 나는 그것을 스스로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자궁이 수축을 하지 않고 풀어지고 늘어진 상태 그대로여서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응급실에서 약 3시간이 넘게 난리를 치고 간호사 한 분이 밤새 내 옆에서 자궁마사지를 해주었다. 다음 날 동이 틀 무렵에야 손맛사지를 멈추어도 자궁은 다시 풀어지지 않고 작게 수축된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였다. 응급실에서 하루를 더 지내고 입원실에서 만 하루를 또 더 지내고 B형 혈액을 세 통이나 수혈을 하고서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1박 2일만 하면 되는 자연분만인데도 3박 4일동안 입원을 하고 아이와 같이 퇴원을 하였다. 둘째는 엄마의 하혈때문에 병원 신생아실에서 나흘을 머물렀다. 이래 저래 우리 두 아이들은 태어나서 첫 주를 다 병원에서 보냈다.


한 생명을 탄생하는 데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나보다 더 심각한 경험을 한 이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내가 아이낳을 무렵은 제왕절개가 빈번히 시행되던 시절이라 더 그랬었을수도 있겠다. 하지만 냐에게는 첫째를 병원에 두고 혼자 귀가할 때의 그 먹먹함, 둘째를 낳고 추위에 떨며 수혈을 하던 그 두려움이 누구의 경험보다 더 크고 절절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도 혹시 아이가 내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다보면 지금도 또 가슴이 철렁하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아니 세상의 엄마들은 우리 아이들의 무사함에 대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향하여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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