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임신한 내가 회사에서 일하고 생활했던 소소한 기록
1997년에 결혼을 하고 1998년에 첫 아이를 낳았다.
1997년과 1998년.... 대한민국이 IMF라는 평소같으면 잘 알지도 못했을 단체에게 점령당하고 온 나라 직장인들이 종이 한 장과 이메일 통고에 하루 하루 안도와 절망의 한숨을 번갈아 쉴 때이다. 그 즈음에 나는 시대에 발맞추기 못하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나는 1997년 당시 흔치 않았던 외국계 회사를 다니고 있었다. 모두들 부러워했다. 하루 8시간의 노동 시간을 칼같이 지켰고 한 시간의 초과 근무에도 1.5배의 수당을 챙겨주던 회사였다. 남들 출근하던 주말에는 꿀 같던 늦잠을 잘 수 있던 회사였다. 하지만 이렇게 천국같았던 회사는 경제위기가 닥치니 중간 경유지도 거치지 않고 바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1997년 11월 21일에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는데 내가 다니던 회사는 3개월만을 지켜보더니 1998년 1월에 회사 철수의 결정을 내렸다. 고로 나는 천국같던 외국계 회사를 타의로 그만두고 철수하던 그들의 은혜(?)로 말미암아 군인 출신 회장님이 운영하던 전형적인 한국회사에 고용이 승계되었다. 그때가 1998년 5월이었다.
불행히도(!) 고용승계될 당시 나는 임신 3개월차였고 고용 승계되었던 ㄷ회사는 그전까지 단 한번도 임신과 출산을 경험해본 여직원을 가져본 적이 없는 회사였다. 여느 때같으면 당연히 회사를 짤리고 출입문 근처에도 발을 못 붙일 곳이었지만 사업 인수의 조건은 다른 사업적 조건과 함꼐 고용 승계된 직원의 보장이었다. 덕분에 나는 ㄷ회사 출근 첫날 첫 인사에서 "나는 지금 임신 3개월입니다."라는 인사말을 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출근 첫 날 내가 남긴 "나는 임신 3개월입니다."는 말로 며칠 동안 사내가 분주했다고 한다.
"자기가 임신했다고 당당하게 말해대. 와, 우찌 반응해야할 지 모르겠더라."
"회사는 계속 다닐 수 있나? 임신한 여자가 다니는 경우는 없었잖아."
"좀 특수한 케이스니 계속 다니겠지. 회사에서 짜르지는 못할거야. 인수 조건도 있고. 근데 좀 있다가 결국 사표쓰지 않겠어?"
"우린 뭐 임신한 여자한테 시키면 안되는 일 이런거 있나? 뭐 어떻게 하면 되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나돌았다고 한다. 여하튼 그들이야 그러건 말건, 나는 전혀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이 없었으므로 하던 대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아니, 어쩌면 더 열심히 하였다.
ㄷ회사는 화학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공장은 사무실 옆에 있었고 복도를 지나 생산현장에 들어서면 항상 솔벤트 냄새가 진동하였다. 생산을 책임지고 있는 차장은 현장 2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나는 거의 매일 현장 사무실로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다. 나는 영업부 직원이었는데 내 고객에게 필요한 제품의 생산의뢰를 내가 직접하고 내가 생산의뢰한 제품의 생산공정을 확인하러 매일 들러야 했다.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물건은 계속 순위가 밀리기 때문에 소위 '얼굴 도장'을 찍으러 가야했다. 그래야 내가 외뢰한 생산 완료 날짜에 제품이 나오던지 아니면 하루 정도 늦게 나오던지 했다.
지금이야 시스템으로 이뤄어지니깐 조금 덜해졌지만(그래도 한국 사회에서 얼굴 도장은 여전히 중요하다) 1998년 당시로는 매일 생산부 차장에게 '얼굴 도장'을 찍고 캔 음료수 하나라도 책상위에 놓고 약간은 비음섞인 목소리로 "차장님~"해야 내 물건이 제때에 나왔고 나는 무사히 납품을 할 수 있었다. 흔히들 고객 영업보다 사내 영업이 더 힘들다고 했다. 나는 아침마다 솔벤트 냄새맡아가며 점점 불러오는 배를 끌어안고 공사장에서 쓰는 철제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했다. 생산이 밀리는 때면 솔벤트 냄새맡아가며 부른 배를 내밀며 한 시간을 넘게 "차장님"하고 읍소하며 생산 사무실에서 진을 친 적도 많았다. 생산부 차장에게 구두로라도 약속을 받아가지고 나올때면 '지금 내가 뭐하는 짓인가'하고 서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는 몰래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했다. 이렇게나 솔벤트 냄새를 많이 맡는데 혹시라도 기형아가 나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감히 회사에 제안이나 이의 제기를 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생산부 사무실직원만 구슬리면 현장 직원들에게 밉보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보름에 한 번 정도는 각 현장팀을 돌며 음료수 한 병씩 돌리며 또 '얼굴 도장'을 찍어야 했다. 화학제품 만드는 현장에 안전모도 안쓰고 안전화도 안 신고 솔벤트 냄새를 한 시간가량 맡아가며 5~6 공정의 현장을 한 바퀴도는 것이다. 내가 화학 제품 영업을 하는 건지, 보험 영업을 하는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다행히 배가 부른 아줌마가 '먹을 것'을 들이밀며 '잘 봐달라'고 인사치레를 하니 마다하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튕기면서도 많이 도와주었다.
공정이 밀릴 때는 특히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는 라벨부착 같은 작업은 급하면 내가 직접 라벨을 뽑아들고 가서 라벨붙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물론 현장을 돌거나 라벨 부착 작업을 한 후는 어김없이 야간 근무를 해야했다. 야간 근무를 할 때 특히 월말 마감을 할 때는 전산환경이 좋지 않아서 수작업으로 전표를 맞추기가 일쑤였는데 8시 9시까지 일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럼에도 나는 '임신 여성으로 이러면 안된다'는 말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농반 진반으로 친한 동료끼리는 "어이, 아줌마, 좀 살살해라. 그리 열심히 하다 조산하면 어쩔라고. 자기 몸은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말은 듣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본인 일에도 치여서 비록 임신한 여성이라해도 남을 살펴 줄 처지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