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임신한 여성이 회사에서살아남기- (2)

by 홍월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무슨 쓸데없는 오만이었나 싶다. ‘여자라서 안 된다’ ‘임신한 여자라서 더 안 된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내 몸과 내 뱃속의 아이한테 못할 짓을 많이 한 것 같다.


제품 출하를 몇 시간 앞두고 라벨의 표기가 잘못 된 것을 발견했다. 생산부 차장한테 가서 리라벨을 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안 된다는 말만을 들었다. 약속된 제품 출하 시간은 다가오고 마음이 급하니 도리가 없었다.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팔 밖에. 나는 생산관리부에 가서 라벨을 찍어달라고 부탁했고 현장에 가서 여분의 신너(Thinner)를 작은 통에 옮겨 담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출하까지 얼마 남지 않는 시간 안에 내가 직접 라벨을 떼고 다시 붙이기로 했다. 약 250여개 정도 되었던 것 같다. 4칸씩 3줄 2단으로 쌓여있는 제품 10 파레트를 쪼그려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며 먼저 신너를 발랐다. 한 번 바르면 기존 붙어있는 라벨이 잘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초벌 바름을 하고 한 번 더 발라야 했다. 처음 신너를 붓에 바르고 제품에 칠할 때는 신너 냄새가 코를 찔러 순간 어질하기도 했는데 이 어지러움이 신너 냄새때문인지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한 것 때문인지 나는 잘 몰랐다. 배불뚝이 아줌마 혼자 신너통을 들고 앉았다 일어났다는 반복하는 모습이 안되어 보였는지 창고의 자재 관리하시던 직원이 도와주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신너 냄새를 맡으면서 이 강한 화학제품 때문에 또 기형아가 되는 건 아닌 가 조바심이 났지만 그 순간은 납품 지연에 대한 고객의 클레임이 더 나를 움직이는 동기 부여가 되던 시절이었다. 학창 시절에 환각에 젖으려고 일부로 부탄가스를 흡입하거나 신너를 흡입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시절 내가 맡았던 신너 냄새 양도 아마 꽤 됐지 싶다.


비록 IMF 경제 위기로 가계와 기업이 모두 힘든 시기였지만 회사 회식은 왜 그리 또 자주 했는지 모를 일이다. 시대 분위기였으리라. 힘들면 힘든 대로 다 같이 ‘으싸 으싸’하자고 다 같이 한 잔, 힘든 와중에 수주와 같은 좋은 소식이 있으면 좋다고 또 한 잔. 핑계도 많았던 사내 회식, 부서 회식이었다.


더운 여름날로 기억한다. 영업부 전체 회식이 있었다. 상무급이었던 총괄본부장까지 참석하는 규모가 큰 회식이었다. 나는 배가 꽤 불렀었다. 임신 7개월쯤 됐던 것 같다. 전체 회식으로 고깃집에서 떠들썩하니 고기를 먹고-물론 술도 같이-다들 2차를 간다고 했다. 나는 2차는 굳이 안 가도 되는데 왜 간다고 했는지, 철이 없었던 것 같다. 괜히 영웅심-봐라, 나는 임신했음에도 회사의 단합을 위해 열심히 한다. 일도 열심이지만 어울림과 놀기도 너희들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도 한 몫 했으리라.


2차는 대형노래방이었다. 모두들 한바탕 춤과 노래와 술이 어우러진 큰 한 판 회식을 가졌다. 나는 같이 어울리면서도 언제쯤 자연스레 빠져나갈까 하며 호시탐탐 출입구를 바라보곤 했다. 모두들 노래를 부르는데 어느덧 나도 차례가 되었다. 나는 크게 흥을 한 번 돋우고 퇴장하면 되겠다 생각했다. 지금도 선명한 기억이다. 나는 디바의 ‘왜 불러’를 선곡했다. 이 노래가 1998년 4월에 나왔으니 그 때 회식 당시 한창 인기가 있었다. 나는 디바의 ‘왜 불러’를 아주 흥겹게 춤까지 춰가며 열과 성을 다해서 영업부 직원으로서 2차 회식을 즐기고 동료, 상사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러곤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퇴장합니다. 모두들 즐겁게 노시다 내일 뵙겠습니다~!“라고 화려한 멘트를 날리며 자랑스럽게 회식자리를 나올 수 있었다. 퇴근 길 택시 안에서 배가 땡기고 다리가 부어 힘들었지만 내 할 도리는 했다는(!) 참 부질없는 자부심에 젖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디바의 ‘왜 불러’를 들으면 그 때가 생각나서 뿌듯하기도 하고 내가 안쓰럽기도 한 그런 복잡한 심정이 든다. 아무튼 그 노래를 지금도 좋아한다.


임신 중에 경험했던 힘든 일 중 하나는 단연코 ‘승선과 구토’이다. 당시 내 주요 거래처는 거제도에 있었다. 자주 가면 한 달에 3~4번 정도 출장을 가고 했는데 아무래도 임신하고는 물리적 거리가 있는 출장은 회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드시 한 달에 한 번은 출장을 가야했다. 발주 없이 선입고 된 건을 그 달 안에 처리하고 세금계산서를 끊으려면 선입고 서류 뭉치를 들고 가서 거래서의 현물 도장을 반드시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거가대교가 없었다. 버스는 완행이라 부산에서 장승포까지 4시간 30분이 걸렸다. 임신한 몸으로 운전은 무리였다. 그래서는 나는 한 달에 한 번 가는 출장에는 50여분이 걸리는 배를 이용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문제가 되어 없어진 세모해운이 부산과 거제도 간 배를 운영했다. 지금도 기억한다. ‘로얄페리호’ ‘페레스트로이카호’ ‘데모크라시호’ 나는 선체가 약간 높고 좁은 ‘로얄 페리’보다 선체가 넓고 좀 더 낮은 ‘페레스트로이카’나 ‘데모크라시’를 애용했다. 롤링의 폭이 경험상 더 작아서 멀미도 덜했다. 그런데 그 날은 온 바다가 강한 파도였나 보다. 임신 8개월째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마지막 출장이었고 9개월째부터는 업무를 인수인계하기 시작하여 내가 직접적으로 출장을 안 갔기 때문이다.


아침 9시 출발하는 배를 타고 자리에 앉았다. 파도가 좀 있다고 알고는 있었지만 늘 타던 ‘페레스트로이카’라면 내가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배에 시동이 걸리고 가까운 바다를 벗어나 조금 더 먼 바다로 배는 진격했다. 그러자마자 페레스트로이카는 앞뒤와 위아래로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가 개혁과 개방을 외치고 진군하면서 갈피를 못 잡고 심하게 우왕좌왕하는 듯 했다. 직원들은 검은 비닐 봉투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나는 봉투를 벌리고 고개를 숙이며 구역질을 하다가 도저히 봉투로는 감당이 안될 지경이 되자 화장실로 직행했다. 나와 같은 심정의 사람이 많았던지라 화장실에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다. 10여분을 봉투와 씨름하다가 마침 빈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 때가 배가 출발한지 10분이 채 안되었을 때다. 그 때부터 나는 40여 분간 한 번도 화장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계속 변기를 붙잡고 그 날 아침 먹은 것과 어제 하루 종일 먹은 것까지 다 게워내었다. 배가 거제도에 도착했을 때에는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어서 노란 위액까지 나오고 난 후 였다. 나는 정말 40분 넘게 변기 앞에 쪼그려 멀미를 할 때 이러다 뱃속의 아이마저 밑으로가 아닌 위로 올라와 입으로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걱정이 들었다.


하선하고 오후 4시 배를 타고 섬을 나오기 까지 하루 종일 속은 메슥거렸고 땅은 계속 움직여 댔다. 그 날의 경험은 날 이후 평생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는데 나는 지금도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배를 타는 것을 너무도 무서워한다. 나는 정말 그 날 배 안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게 되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일들을 다 겪고 나는 무사히(?) 출산 일 일주일 전에 출산휴가를 떠났다. ㄷ회사에 처음으로 발생한 출산휴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출산휴가를 마치고 그대로 내가 사직서를 쓰고 퇴사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내 가장 가까운 여자 동료와 내 직속 남자 상관만 빼고. 나는 신너 냄새도 맡고 단란주점에서 몸도 흔들어대고 심한 멀미도 겪은 것이 아까워 퇴사는 일찍이 포기했다. 누구 좋으라고!


그 때는 출산휴가가 60일 뿐이었고 육아 휴직도 없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내가 실제로 아이를 낳고 키운 것은 한 달 반 정도뿐이었다. 두 달이 채 넘지 않은 아이를 떼 놓고 출근하는 길이 그렇게 스트레스 받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갓난아이는 보채지도 않고 엄마 가지 말라고 울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좀 더 크고 말을 시작할 때가 더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아이가 어린 순간이 맘은 더 편하다는 것을 그 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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