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의 아침은 전쟁터의 피난길이다. 15여년 전 나의 아침도 여기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물론, 이 명제는 모든 시기에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아이가 자리는 시기마다 전쟁의 수위가 다르다.
아이가 하나이고 엄마 혼자서 안을 수 있거나 손을 잡고 같이 걸을 수 있는 단계는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기 보다는 전쟁의 조짐이 보이는 긴장단계라 하겠다.
출근 준비를 하고 누워있는 아이의 옷을 갈아입히고 기저귀, 분유 등 준비물 가방을 들고 카시트에 앉혀서 아이를 키워주었던 친정엄마 집으로 가는 건 아이가 없을 때의 아침보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더 소요되는 정도였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손을 잡고 걸을 정도가 되면 10분 정도 더 추가된다. 옷을 갈아입힐 때도 세수를 시킬 때도 아이는 누워있을 때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기에 운 좋게도 아침밥을 내가 준비하지 않았다. 아이를 데려가면 친정엄마가 아이 아침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켰기 때문에 우리 집에서 준비하는 아침은 30분 정도 더 일찍 준비하는 그냥 보통의 일상이었다.
아이가 둘이 되는 순간부터 전쟁은 시작된다. 아직은 전초전이다. 서로의 전투력만을 확인하는 작지만 잦은 전투가 전개되는 것이다.
둘째가 갓난아이일 때 내가 옷을 갈아입혀도 기저귀를 갈아주어도 아이는 얌전히 누워있었다. 이제 막 까불기 시작하고 혼자서 무언가를 하려고 애를 쓰는 아들인 첫째는 순순히 몸을 내어 주지 않음으로써 막 시작된 전쟁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첫째는 아침에 쉬이 눈을 뜨지 못했고 4살이나 되어 몸무게가 제법 나갔던 터라 예전처럼 내 손안에서 휘어잡을 수 없었다. 가만있는 마네킨의 옷을 갈아입히는 것과 의중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 침팬지의(아들아, 미안하다. 침팬지와 너를 비교하는 엄마를 용서해다오.)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시간과 노력의 투입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출근 가방과 아이들의 등교용품, 육아용품 가방을 들고 아이 둘을 데리고 집을 나서려면 첫째는 반드시 잠이 깨어 걸어 나가야 한다. 출근용 정장을 입고 둘째를 한 손으로 안고 한 손은 각종 가방을 들고 있으니 첫째는 정신이 깨어 걸어 나가야만 나는 집을 나설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용감한 원더우먼이 아니었던 나는 이즈음부터 자갈치 시장 생선가게 아줌마 저리가라 할 정도로 고함을 지르게 되었다. 지각을 할까봐서 마음이 급하여 잠도 덜 깬 첫째를 질질 끌다시피 데리고 나온 적도 있었고 정말 조급한 마음이 목까지 차올랐을 때 각종 가방들을 모두 어깨에 동여 매고 한 손에(거의 어깨에) 아이 하나씩을 안고 13층 아파트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 적도 몇 번 있었다.
한 번은 전날 밤 늦게 잠들었던 첫째가 도저히 정신을 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나는 할 수없이 첫째 먼저 안고 내려가 차에 태워 혼자 두고 다시 집으로 올라가 둘째를 안고 내려온 적도 있었다. 물론 그날은 지각이었다.
그래도 세월은 흘렀다. 첫째가 7살이 되고 둘째가 4살이 되었다. 이제 둘 다 걷고 의사표현도 명확히 할 수 있으니 훨씬 수월해졌겠네. 라는 말은 사양하겠다. 처음엔 나도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좀 크면 사정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사에 있어 육아에 있어 경험자들의 말은 얼마나 정확한지! 나의 두 언니들은 곧잘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아이들은 뱃속에 있을 때가 제일 편하고 세상에 나오고 나면 가장 어릴 때가 제일 편하다.“
아이들에게 의지가 생기고 의사표현이 자유롭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아침 출근전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나는 단골 지각 회사원이 되었다.
우리 회사의 출근 시간은 8시 30분이었다. 친정엄마가 두 아이의 양육을 맡아주었기에 우리 집은 친정집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다. 우리 집에서 차에 타서 시동을 켜고 친정집에 도착하면 약 10~15분가량 걸렸다. 두 군데 있는 사거리 교통 신호등과 신호등이 없는 작지만 복잡한 4거리를 얼마나 빨리 통과하느냐가 10분대 안에 도착을 하는지 15분을 꽉 채우는지를 좌우했다. 친정집에서 회사까지는 약 35km의 거리로 빠르게는 45분 교통 사정의 여의치 않은 월요일은 1시간이 걸렸다. 역순으로 계산해보면, 나는 7시 30분에는 아이들을 친정에 내려주고 회사로 출발해야 했고, 7시 30분까지 친정집에 도착하려면 우리 집에서 7시 15분에는 나와야 했다. 7시 15분에 집에서 아이들과 출발을 하기 위해 나는 6시경 기상을 했다. 이 시간도 내 출근 준비(씻고 화장하고 옷 갈아입고)와 아이들 등원준비(씻기고 입히고 준비물 챙기고)하는데 절대 넉넉하지 않았다. 실은 내가 여유롭게 움직이고 두 아이와 전쟁을 치르기 않으려면 5시 30분에 기상을 하는 게 맞았으나, 현실적으로 나는 도저히 그 시간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그렇게 했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건 일회성일 뿐이었다.
나는 씻고 옷을 입으면서 두 아이에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xx야, oo야 6시 30분이다. 일어나라. 어서!” 아이들은 아직까지 꿈나라이다. 나는 옷을 입는 내내 “일어나라. 할머니 집 가야지. 어서. 빨리 빨리. 엄마 지각한다!”라는 매일 반복되는 알림을 울려대었다. 우리 아이들은 내가 화장을 끝날 때까지 스스로 먼저 일어나지 않았다. 내 준비가 끝나면 나는 둘째부터 먼저 억지로 일으켜 세수를 시킨다. 원래는 첫째 먼저 씻겼는데 사내아이가 무게가 많이 나가다 보니 안고 끌고 억지로 세면대로 가는 것이 힘에 부치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나는 작고 가벼운 둘째부터 씻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잠에 취해 있더라도 얼굴에 물칠을 하면 잠이 깨긴 마련이다. 이 때 아이는 울면서 잠투정을 하였다. 나는 아이의 잠투정을 받아줄 여유가 없었다. 울든 말든 눈곱을 떼고 코를 풀리고 세수를 시켰다. 뒤이어 첫째아이와 이 같은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런데 두 아이는 세수를 다 하고도 옷을 다 입고도 내 맘같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나무늘보같이 느릿느릿, 자기들은 급한 거 하나도 없는 듯이 움직였다. 아니, 실제로 아이들은 급할 게 하나도 없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등원 차량은 9시와 9시 30분은 되어야 왔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 출근 시간 때문에 내 맘이 급해서 나무늘보 같은 아이들에게 전쟁에 쓰는 대포 같은 함성을 연발로 발사하였다.
최악의 사태 중 하나는 이렇게 대포도 쏘고 기관총도 쏘면서 일방적인 전쟁을 했는데 차를 타고 가다보니 무언가를 빠뜨렸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이다. 순간적으로 되돌아가야 할지 무시하고 친정으로 바로 가야할지 아주 큰 고뇌를 한다. 바로 친정으로 가면 5분~10분 내외의 지각뿐이지만 되돌아갔을 때는 15분 이상의 지각은 따 놓은 당상이다. 아침 출근길 교통상황은 5분이 늦어지면 도착은 15분이 늦어짐을 이미 여러 번 체험한 바가 있었다.
돌이켜 보았을 때 나는 정말 최악의 엄마였다.
출근길 나는 바빠 죽겠는데 이미 지각이 확실한데 아이들은 내 맘같이 움직여주지 않았을 때 운전하면 보인 내 행동이 있었다. 이런 일이 연속으로 반복되었거나 회사에 아침부터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때 특히 내 분노는 일본에게 진주만 폭격을 당한 일요일 그날 미군과도 같았다. 당장 핵폭탄을 터트리지 않으면 내가 폭발할 것 같았다. 나는 분노 표출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방법으로 하고야 말았다.
아이들을 뒷자리에 태우고-당시 4살 딸만 카시트에 타고 있었고 7살 아들은 카시트에 앉아있지도 않았다. 7살 카시트는 당시 의무가 아니었다. -아이들이 이리 저리 휘둘리든 어떻든 상관도 없이 나는 엑셀을 있는 힘껏 밟았다. RPM은 순식간은 4~5를 넘었고 마치 고속도로 최고 속도를 달리는 마냥 가속을 해대었다. 뒤에서 애들은 앞좌석을 꽉 잡고 내 눈치만 보았었다. 그러다 빨간 신호등을 만나면 바고 급정거를 해대었다. 그러면 차는 끼익하면서 몸이 앞으로 쏠리게 마련이었다. 아들이 물었다. “엄마, 뭐 안 좋은 일 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순간 죄책감에 너무 부끄러워서 지각을 할 것 같아 걱정이 좀 되는 것뿐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아들은 또 물어보았다. “엄마, 우리가 일찍 준비 안 해서 화났지? 그래서 그런 거지?” 나는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풀며 뒤를 돌아보며 너희 때문이 아니라 엄마 때문에 화가 난거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내 말이 온전한 진심이 아닌ㅁ을 알았던 걸까? 아들의 그 다음 말에 나는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들은 말했다. “동생이 무섭나봐. 지금 내 손을 꽉 잡고 있어. 그리고 나도 지금 엄마가 좀 무서워”
나는 아동 학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른인 내가 연약한 아이를 상대로 내 화풀이를 폭력 운전으로 보복하였던 것이었다. 아들의 말을 듣고 나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곤 깨달았다. 아이는 아이이고 어른인 나와 똑같이 할 수 없다고. 아침이 급한 것은 나이지 아이들이 아니라고.
이 사건이후로 나는 정시에 출근하는 것에 대한 욕심을 접었다. 나는 회사에서 ‘애 엄마들은 저렇게 지각을 밥 먹듯 하니 역시 안 돼’라든가 ‘애 있는 게 무슨 유세인가, 맨날 늦게.’같은 일설을 듣기 싫었고 애 엄마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남성 직원 혹은 미혼 여성 직원들과 근태 하나에도 뒤처지기 싫었다. 이런 내 욕심 때문에 나는 아이들을 희생시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태가 안 좋다고 경고를 준다면 받고 해고를 시킨다면 회사를 나가고 말지라는 마음을 먹고 나니 우리 집의 아침 전쟁터에도 일정 부분 변화가 왔다. 물론, 나는 여전히 대포를 쏘아 댔고 기관총을 쏘긴 했지만 우리 아이들을 공포 속에 내던지지는 않았다.
세월이 아주 많이 지난 일이라 나는 애들이 폭력 운전을 잊은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불과 며칠 전 가족이 맞벌이 가정에 대해 뉴스를 보면서 얘기할 기회기 있었는데 아들이 불연 듯 말했다.
“우리 어릴 때 엄마도 아침에 지각할 때는 막 난폭하게 운전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그지? 그 때 사장님한테 야단 많이 맞았어?”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바로 대꾸할 수가 없었다. 아, 아이들은 기억을 하고 있었구나! 가슴에 흔적은 남아 있었구나! 우리 아이들 가슴에 흔적까지 남기면서까지 나는 왜 그렇게 치열한 전쟁을 혼자서 벌이고 있었던 것인지 늦은 자책을 하면서 유연근무제가 정말로 당연한 듯이 생각되게 정착되어야 하며 그래서 그 때 카시트에서 오빠 손을 꼭 잡고 벌벌 떨었을 내 딸은 전쟁의 경험 없이 여유롭게 육아와 경력을 병행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