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책과 함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월 Feb 19. 2020

서평 -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고 밑줄 그은 문장도 되게 많았는데 감상문을 남기려고 하니 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걸까?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을 키보드 자판 위에 올려둔 채 움직이지 못하고 그냥 멍하니 앉아만 있다. 분명 지난주 책을 막 덮었을 땐 할 말이 많았는데.    

<자기 앞의 생>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모모라는 애칭을 쓰는 모하메드라는 10세 소년(나중에 14살이라는 것이 밝혀지지만)은 어느 건물 7층에서 창녀들의 아이를 주로 맡아 키우는 로자 아줌마 집에서 다른 창녀의 아이들과 같이 살고 있다. 이웃에는 많은 좋은 인생 선생님들이 있다. 양탄자 행상을 하는 하밀 할아버지, 5층에 사는 여장남자 롤라 아줌마, 의사인 키츠 선생님, 자수성가한 포주 은다 아메데씨. 모모가 사는 벨빌(아름다은 마을이라는 뜻)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창녀, 포주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은 당시 프랑스 기준에서도 정상적인 사회에 빌붙어서 사회를 좀 먹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모모에게는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진리와 삶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 등을 가르치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살아있는 학교이자 선생님들이었다. 10살이었던 모모가 몇 달 만에 14살이 되고 부모와 다름없는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그녀와 이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이 과정을 어린 모모의 시각에서 그린 일종의 성장 소설이다.     

모모의 시점에 씌여지긴 했지만 에밀 아자르의 생각임에 틀림이 없을 모모의 사람에 대한 시각, 세상에 대한 관점 그리고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는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보석 같은 언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줄을 긋다긋다 못해 나중에는 줄 긋기를 포기했는데 줄을 계속 긋다가는 모든 글을 다 필사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같이 책을 읽었던 지인들은 모모와 로자 아줌마와의 끈끈한 관계와 사랑, 휴머니즘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 역시 사랑과 인간애를 이야기했고 시간을 이야기했고 안락사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14살 모모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아는 온갖 현학적인 말로 사랑을 아는 체했고 죽음에 대한 관념적인 말들로 감상을 채웠다. 혹자는 그런 나에게 ‘느낀 점이 많았나 보다’ 라거나 ‘생각을 깊이 했나 보다’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나는 죽어가는 로자 아줌마를 돌보는 모모가 기특하긴 했어도 아직 세상 물정을 알기엔 어린아이로 느껴진다. 모모는 아직 14살밖에 안 되었으니까 온 주변의 좋은 이웃 선생님들이 모모더러 로자 아줌마를 병원으로 모셔야 한다고 합창하듯 이야기해도 로자 아줌마가 싫어하니까 죽어가는 사람도 인권이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로자 아줌마의 마지막을 책임진다. 그래 그건 모모가 고작 14살이니까 가능했을 것이다.     

내가 14살 무렵에 80이 넘은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생업과 살림에 바쁜 부모님 대신 나는 내 유년의 많은 시간을 할머니와 보냈다. 할머니와 서로 정이 각별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흘 내내 울었다. 입에서 ‘할’ 자만 나와도 할머니의 쭈글한 얼굴과 바짝 말라서 살갗이 접히는 손등이 생각나서 또 울었다. 상을 치르고도 거의 일 년은 ‘할머니’ 글자만 봐도 생각만 해도 꺼이꺼이 울음을 내었다. 

내 기억에 엄마는 달랐다. 엄마가 20살에 시집오고 50이 다 되어서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거의 30년을 한 집에서 할머니를 모시고 사신 거다. 엄마는 슬픈 시늉만 내는 것 같았다. 14살 무렵의 나는 엄마가 왜 진심으로 슬퍼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엄마가 약간은 이중인격자처럼 보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엄마 나이 20살에 아직 환갑도 안 된 시어머니와 한 집에서 살았던 것이고 할머니는 며느리를 봤다는 이유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30년 가까이 사신 거다. 그것도 마지막 몇 년은 아이같이 행동하셨다. 엄마가 왜 슬픈 시늉만 냈는지 너무도 이해가 된다.     

그런 엄마가 이제 80이 넘었다. 그렇게 초롱하고 눈치 빠르던 엄마도 이제 당신이 슬픈 시늉을 보였던 당사자처럼 되어 가고 있다. 몸도 병들고 마음도 아이처럼 변하고 있다. 당신은 변해가는 자신을 모습에 슬퍼할까 목숨을 부지하는 것에 감사하며 기뻐할까  

투정 많고 유치해지는 엄마를 바라보는 나는 자꾸만 슬프다. 시들어가는 엄마를 보며 옛날 우리 엄마가 할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엄마처럼 되어가는 것 같아서 슬프다. 밖에서는 효녀인 척 세상없는 부모 생각하는 척하지만 철없는 아이 같은 엄마 앞에선 말 안 듣는 아이 나무라듯 자꾸 엄마를 나무란다. 내가 나쁜 건지 엄마가 나쁜 건지. 내가 슬픈 건지 엄마가 슬픈 건지  

로자 아줌마는 겨우 몇 주 아팠고 겨우 3주 생사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요즘같이 의학이 발달되어 과학이 사람의 생명을 강제 연장시키고 있는 현실에서도 이웃 선생님들은 어린 보호자 모모의 말을 듣고 기다려줬을까? 그리고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3주가 아니라 3달을 아니 3년을 생과 사의 경계를 왔다 갔다 했다고 해도 끝까지 아줌마 곁에서 같이 있어주었을까?    

적당한 기간 3주 만을 견디었기 때문에 모모는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기도 않게 적당히 인생을 배우고 죽음을 관조하고 시간이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 철학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모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적당한 기간이 아니고 징글징글한 기간이 되어 나의 원천을 배반하고 죽음을 원망하는 상황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나에게도 모모처럼 버틸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 주어지기를. 내가 당하는 쪽이든 내가 견디는 쪽이든.

매거진의 이전글 서평 - <달콤한 노래>, 레일라 슬리마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