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제인 에어를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아마도 대학을 갓 졸업한 후였을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은 20대의 처녀가 상당히 두꺼운 제인 에어를 읽어낼 수 있었던 힘은 ‘로맨스’때문이었다. 동화책과 할리퀸에서 많이 읽었던 어려운 처지의 처녀가 역경을 딛고 부자인 남자와 결국은 해피엔드로 행복하게 오래도록 잘 살았다는 이야기. 어린 시절 순정만화와 사춘기 시절 하이틴 로맨스를 교과서보다 더 많이 읽어냈던 나는 20대 중반에 읽은 제인 에어도 그런 맥락에서 읽었다. 감동적인 해피엔딩의 연애소설로 기억을 하며 많은 이들에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고전’으로 제인 에어를 추천하였고 단 한 번도 원망을 들은 적이 없다.
제인 에어를 처음 읽었던 나이만큼의 세월이 지난 후 제인 에어를 다시 읽게 되었다. 나는 제인 에어를 아주 잘 쓰인 로맨스 소설로 여기고 있던 터라 줄거리를 다 아는데 또다시 읽을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세상도 흉흉하니 가벼운 연애 소설로 마음을 몰캉하게 하고 싶기도 해서 4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2권 분량의 완역본을 찬찬히 읽게 되었다.
아, 우리는 ‘고전’이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읽지도 않고서 읽었다고 착각하거나 읽었음에도 기억을 못 하는 것이 ‘고전’이라고 했던가! 20대 처녀였던 내가 만난 제인 에어와 지금 다시 만난 제인 에어는 내가 든 나이만큼이나 다른 사람인 것 같았다. 같은 작품 같은 인물이 많이 다르게 나에게 다가왔다.
로맨스를 그리기 위해 불우한 어린 시절을 갖다 쓰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 주인공을 만들어 낸 줄 알았는데, 제인 에어라는 여성이 어떻게 성숙하고 성장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어린 시절의 우울을 배경으로 깔았고 돈 많은 중년의 남자를 조연으로 선택했을 뿐이었다. 그때는 안 보이던 것들이 지금은 눈에 띄었다. 과거와 현재에 내가 느낀 독후의 차이는 그만큼 내가 성숙했다는 증거이겠지만, 왜 처음 제인 에어를 만났을 때 이 성숙된 감상을 가지지 못했는지 왜 세월이 흘러서야 푹 고아낸 사골 국물 같은 깊이가 나와야 한 건지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느낀 성찰과 감상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첫째, 주인공은 어디로든 떠나야 한다. 떠나야 이야기가 시작되고 떠나야 고전이 된다.
제인 에어는 자신을 키워준 리드 부인의 저택을 떠났고 유년기를 보낸 로우드 학교를 떠났다. 고전의 반열에 오른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집을 떠났다. 오디세우스가 문학작품에서 가출(?)의 시작을 알렸고 같은 그리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오이디푸스도 그러했다. 동양권에서는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와 길을 떠났고 우리나라에선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울분에 못 이겨 집을 떠났다.
경계 안에 머물게 하는 울타리는 안전하지만 역경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아픔과 성장은 역경을 동반하는 것. 그래서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떠나고 있다. 엄마를 찾아 삼만 리나 되는 길을 떠나고(엄마 찾아 삼만 리), 배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를 따라 섬으로 떠나고(그리스인 조르바), 떠날 구실이 마땅치 않으면 비행기 사고라도 내서 섬에 표류하게 만들며(파리 대왕), 이즈마엘처럼 배 타고 멀리 바다로 떠나보내지(모비 딕) 못한다면 작은 배라도 만들어 매일매일 주인공을 바다로 내몰곤 한다(노인과 바다). 삶도 고전이 되려면 일단 떠나야 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이 많아야 한다. 스토리만으로는 고전이 될 수 없다.
내가 20대에 제인 에어를 읽었을 때 로맨스만 기억했던 이유는 줄거리만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출판사의 같은 텍스트를 읽었다. 그때의 나는 주인공의 독백과 생각은 건너뛰고 대화와 줄거리만을 쫓았다. 그러다 보니 제인 에어가 어떤 생각의 지도를 어떻게 그렸는지를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으니 제인 에어의 생각을 따라 책을 읽어 나갔다. 어떤 순간과 상황에 맞부딪힐 때 그녀는 어떤 생각을 가졌고 어떤 결심을 하였나에 더 관심을 두었다. 제인은 소설의 처음과 결말에 사고가 변화하였다. 여러 개의 사건과 사고를 경험하면서 그녀의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진 탓일 게다.
인생 속의 상황이라는 것이 소설이든 실제이든 크게 다를 것이 없다. 태어나고 친구를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헤어지고 이별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이런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극복하고 성장해나가느냐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이지만 동시에 영원한 숙제이다.
고전에서는 독백과 생각의 흐름이 많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작품의 반 이상의 주인공 알료샤의 독백과 생각이거나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의 대화이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에는 철학이 있고 가치관이 있으며 질문이 있고 해답이 있다. 이것은 순전히 줄거리만 따라간다면 독자들은 책을 읽고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작품인지 전혀 파악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알료샤의 독백과 조시마 장로의 생각과 그 둘의 대화를 곱씹어 읽으려니 고전을 읽는 것이 품이 상당히 드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또한 웬만한 철학책에 맞먹는 이해와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비단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만 그렇겠는가? 현재 우리가 고전이라고 일컫는 작품들의 대다수가 생각과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시대정신과 가치관과 철학을 향유하게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 고전에서 나오는 생각들은 작품이 처음 발간되었을 때나 세월이 몇십, 몇 백 년이 흐른 지금에나 원형은 같다. 인간의 삶과 고민은 형태를 달리할 뿐 우리가 던지는 질문의 근원은 거의 같기 때문인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제인 에어는 어린 시절 헬렌 번즈라는 친구를 잃고 이별의 아픔을 겪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스스로 고난을 찾아 떠났다.
나는 자유를 원했다. 자유를 갈망했다. 나는 자유를 원해서 기도를 올렸다. 기도 소리는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흩어져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기도를 그치고 좀 더 겸손한 탄원을 했다. 변화와 자극을 달라고 기원했다. 그 간절한 애원마저 막연한 공간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적어도 내게 새로운 고생살이를 하도록 해주소서!
-152쪽
새로운 고생살이를 찾아 떠난 제인은 손필드 저택에서 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였다. 이러는 동안 제인은 스스로 단단해져 가며 한 인간으로 완성되어갔다. 로체스터의 비밀을 알게 되고 손필드 저택을 떠나 “옆구리를 할퀴는 기아”까지 경험하면서, 제인은 자신의 주관을 뚜렷이 하게 되고 성숙된 인간으로서 자아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생명은 모두 요구와 고통과 책임을 그냥 지닌 채로 아직도 나의 것이었다. 지워진 짐은 날라야 했다. 욕구는 충족되어야 하고, 고난은 견디어야 하고 책임은 다해야 했다. 나는 출발했다.
-P175
많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 스스로 진리를 터득하고 삶의 나침반을 가다듬은 제인 에어. 제인 에어를 다시 읽으면서 심장을 간질이는 로맨스뿐만 아리나 내 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인생 훈련법을 또 하나 배우게 되었다. 이래서 고전은 읽는 나의 상황에 따라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것인가 보다.
나는 어디로 떠나야 할까? 어떤 방향을 기준점 삼아 출발을 해야 할까? 고전을 덮으면서 내 의문은 더 늘어만 간다. 답은, 떠나야만 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