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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Feb 12. 2020

마르셀 에메 -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주인공 뒤티유욀은 자신이 벽으로 드나드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43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정말 우연히 알게 되었다. 의사는 체력을 과도하게 소모하라는 처방을 내렸지만 종일 앉아서 일을 하는 뒤티유욀은 업무 외 시간이나마 신문 읽기와 우표수집 정도만 할 뿐이어서 도무지 체력을 쓸 일이 없어서 벽을 드나드는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전혀 쓸 일은 없는 채 그저 보유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회사에 상사가 바뀌면서 새로운 변화의 지시가 내려오는데 이 변화를 거부하던 뒤티유욀은 벽으로 드나드는 능력을 인지하게 되고 그 때부터 이 능력을 왕성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주로 부자들의 물건을 도둑질하며 의적으로 칭송받다가 스스로 감옥에 갇혔고 또 탈출을 하여 나름 변신을 하여 유유자적 살고 있었다. 하루는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그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인은 유부녀였다. 어쩔 수 없이 늦은 밤 몰래 그녀의 남편이 없는 사이 그녀의 집에서 뜨거운 사랑을 종종 나누게 되었다. 그 날은 두통으로 언젠가 처방받은 약을 먹고 그녀의 집에서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새벽이 되어 늘 하던 것 처럼 벽을 통해 그녀 집에서 나왔는데 갑자기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더니 뒤티유욀은 그만 벽 속에 그대로 갇혀 버렸다.  


약 20쪽이 되는 분량의 이 소설의 줄거리는 정말 위의 요약이 전부이다. 서너 페이지에 있는 삽화를 빼면 순수히 내용은 15쪽 정도뿐이 안되는 것 같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단편소설 축에도 끼지 못할 만큼 짧아서 아마 어디 응모하지도 못했을 분량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현재까지 인구에 회자되면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고 우리나라에서 2~3년 전에 연극무대로 올려지기도 했다. 내용이 이렇게나 짧은데 각색은 어떻게 되었고 연출은 어떻게 되었을지 다시 공연된다면 꼭 연극을 보러가고 싶을 정도이다.  


이 작품은 1943년에 발표되었다. 그 당시를 기준으로 본다면 멀쩡한 사람이 벽으로 드나드는 초능력을 가졌고 별 쓸잘데기 없는 곳에 그 어마어마한 초능력을 쓰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벽에 갇힌다는 기발한 상상력이 정말 신박했었을 것 같다. 그래서 많이 사람들이 좋아하고 인기가 있었을 것이다. 무엇인든지 처음 시도한다는 것은 새롭다는 것에 대한 위험과 엉뚱한 것에 대한 용기와 모험에 대한 호기심이 동반되어야 그 '처음'을 완성할 수 있는 법이다. 지금의 관점에선 그닥 새로울 것 없는 환상동화이지만 1943년 프랑스를 생각해보라. 우울한 그 시대에 이런 기발한 환상을 꿈꿀 자 별로 없었을 터. 


이 작품을 두 번을 읽으면서 (왠만해서 한 번 본 것을 두번 보지않는 편인데 책이 너무 짧아 두번보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드는 생각이 세 가지 정도 있었다.  

첫째, 사람은 역시 여유가 있어야 자기의 능력을 개발하게 된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만큼 변화가 없고 여유가 충족한 생활을 하던 차에 뒤티유욀은 자신만이 가진 능력, 벽으로 드나드는 능력을 깨닫게 된다. 새벽에 일어나 교통지옥에을 통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하게 몸과 머리를 쓰고 소금에 절여진 배추같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이라면 내가 뭘 갖고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전혀 없을 것이다. 뒤티유욀이 벽을 통과하는 능력을 알고 찾아간 의사의 처방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즉, 제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을 소모하면 능력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일상이 스스로를 절인 배추와 같이 만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들이여 자신이 놓치고 있는 능력은 없는지 여유를 갖고 찬찬히 관찰해볼지어다.  


둘째, 사는데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뒤티유욀이 그렇게 좋은 능력이 있었다해도 상사가 바뀌지 않고 또 상사가 바뀌었더라도 업무에 변화를 주지 않았더라면 뒤티유욀은 살던 대로 살았을 것이고 자신의 능력을 되찾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뒤티유욀은 강하게 거부했지만 어쨌든 상사덕분에 능력 개발을 이루었다. 그에게 감사해야 한다.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모든 외부 변화에 대부분 감사하고 볼 일이다.  


셋째, 자신의 주변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정리 정돈을 잘 하지 못하지만 적어도 의약품이 어디에 있는지 뭐에 쓰는 약인지 정도는 알고있는 사람으로서, 그냥 두통약이겠거니 짐작하고 알약을 먹어서 능력을 잃게되는 것은 안타깝기 그지 없다. 과유불급이라고 자신의 능력을 막 써도 되는 지경이 되니 긴장을 늦추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첫 눈에 반한 사랑하는 여인에 온 맘을 다 쏟고 있었기 때문일까? 뒤티유욀은 체력을 소진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의사가 처방해준 약을 두통약으로 잘못 알고 먹는 실수를 한다. 능력이 생긴 이후에 처음처럼 약간의 긴장과 생각을 하고 지냈다면 충분히 방지할 수 있는 실수였다. 사람은 익숙해지면 편해지고 편해지면 습관이 된다. 습관이 되는 순간 생각의 횟수는 줄어드는 것이 이치이다.  


이 책에는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외에도 생존 시간 카드, 속담, 칠십 리 장화, 천국에 간 집달리 의 4개 작품이 더 실려있다. 개인적으로는 '생존 시간 카드'가 너무나 재미었었고 어릴 적 보던 환상특급에서 나올 법만 이야기여서 기발한 상상력과 전개에 푹 빠져서 보았다. 


속담과 천국으로 간 집달리는 전래동화같은 느낌이 있었고 칠십 리 장화는 안데르센의 따뜻한 동화같은 분위기의 책이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양한 분위기의 글을 쓴다는 것에 놀랍고 그 시절에 이렇게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 또 놀랍니다. 여러모로 부러울 따름이다. 그래서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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