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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Jan 21. 2021

박완서 -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여보세요? 현주씨? 나예요 홍월. 잘 지냈어요? 오랜만이네요.

참 내가 그 동네 살 때만 해도 종종 만나고 얼굴을 보고 해서 그리운 줄을 몰랐는데 이사를 오고 보니 멀어진 거리만큼 그리움이 쌓이는가 보네요. 아니, 코로나 때문에 내가 이사를 갔든 계속 거기서 살았든 얼굴 못 보는 것은 똑같았을라나?

   현주 씨가 요번 참 독서모임 주재자로서 박완서의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을 추천했잖아요. 저는 이 책을 막 다 읽었네요. 열렬한 독서광인 현주 씨는 벌써 읽었죠? 한번 읽고 또 읽고 아마 한 세 번쯤 읽었겠죠? 현주 씨 원래 이 책은 보름 씨가 작년에 하려고 추천한 책이잖아. 그런데 보름 씨도 이사를 가버려서 우리 독서토론 모임에서 못했었잖아요. 요번에 현주 씨가 새해 첫 독서토론 모임용으로 이 책을 추천해줘서 고마워요. 아니, 보름 씨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현주 씨는 이 책을 왜 선택했어요? 같은 고향 사람인 보름 씨에 대한 그리운 감정이 있어서 그랬는가요? 아니면 책 분량이 적어서 그랬는가요? 아니면 박완서 작가를 좋아해서? 그도 아니면 책이 좋다는 얘기를 어디 딴 데서 들었었는가요? 아무튼 현주 씨, 덕분에 이 책을 읽게 해 줘서 고마워요.

   솔직히 나, 박완서 작가 책 처음 읽은 것도 작년이었잖아요. 박완서야 워낙 유명해서 이름이야 너무 많이 들었지만 책을 읽은 건 작년 1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였거든요. <그 싱아...>를 읽고 왜 내가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이제야 읽었던가, 하며 얼마나 후회를 하고 부끄러워했던지 몰라요. 그 이후로 몇 권을 더 읽었거든요. 이후로 읽은 몇 권은 처음 읽었던 <그 싱아...>만큼 감동이 크지는 않았어요. 당연하겠죠. 뭐든지 '처음'은 남다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처음'하는 것에는 특별히 이름도 붙이고 의미도 갖다붙이잖수. 뭐, 첫사랑 첫인상 첫 만남 첫 모임 첫아이 이렇게. 그런데 있잖아요, 책의 감동과 재미와는 별개로 박완서라는 작가, 글은 참 잘 쓰네요. 필력이 좋단 말이지. 표현이 죽인다는 말이에요. 비유도 좋고 은유도 뛰어나고 표현도 탁월하고.

   

   소설 첫 장, 에 그러니까 내 책으로 372쪽에 '연결된 전화통에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아마 형님은 모르실 거예요. 절벽 같아요. 내가 뛰어내리지 않으면 누가 떠다밀기라도 할 것 같은 절벽 말이에요'라든가 그다음 페이지에 '사극에 나오는 대비마마처럼 이렇게 감정이 섞이지 않은 형님의 목소리'라든가 하는 표현은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낯선 관용어구인데도 들으면 이게 딱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바로 감이 오잖아요? 도대체 박완서는 이런 말과 표현을 만들어내려고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까요? 아니, 혹시 박완서 작가는 글만 쓰면 이런 표현들이 머릿속에서 그냥 줄줄이  나오는 거 아닐까요? 소설 속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박완서 작가의 이런 세세한 표현과 필력에 빠져들어서 책을 줄줄 읽게 되는 것도 있는 거 같아요. 적어도 내 경우엔 그랬어요. 몇 년 전 tvN 예능프로 '알쓸신잡' 있었잖아요? 거기 시즌 1에서, 실은 '알쓸신잡'이 시즌 3까진가 나왔을 텐데 나는 뭐니 뭐니 해도 시즌 1이 제일 재밌었어요. 안 그렇든가요? 말이 딴 데로 샜는데, '알쓸신잡' 시즌 1 어느 편인가에서 김영하 작가가 박완서 작가를 가르키며 한 말이 있었거든요.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다. 이름 모를 꽃이라고 쓰는 젊은 작가들은 너무 게으른 것 같다."라고. 내가 정작 그 프로를 볼 때는 아, 박완서 작가는 저런 멋진 말도 했구나, 하고 생각이 참 바른 작가 구나하고 넘겼지. 근데 박완서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란 사물의 이름을 아는 자다'는 박 작가의 말이 자꾸 생각이 나는 거라. 왜냐하면 박완서 작가 책에는 진짜 허투루 쓰는 단어가 없고 막 갖다 붙인 표현이 없는 거 같더라고요. 대단하지 않아요? 난 정말 부러워서 똑 신경질이 나는 거예요.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뭐 글을 잘 써서 신경질이 난다는 건 아니고, 너무 글을 잘 쓰니까 자괴감이 드는 거라. 근데 박근혜 대통령이 '내가 이럴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듭니다'이후 자괴감이란 단어를 막 못쓰겠는 거라. 그냥 평범한 단어였는데. 이상한데 엮여서 쓰여갖고 자괴감이란 말만 하면 자꾸 박모 대통령이 생각나. 이것도 속상해 죽겠네요. 좋은 것만 생각하기도 바쁜 생각인데 세상엔 웬 탄핵당한 전 대통령이? 다시 생각하니 또 열 받네요. 자꾸 말이 딴 데로 새는데, 암튼 박완서 작가는 워낙 유명하고 상도 많이 타고 베스트셀러 작가니 글을 잘 쓰는 게 당연한데, 왜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천재들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과정을 쏙 빼먹고 결과물만 보고 부러워하고 나도 저 정도야, 하는 마음을 가끔 가지는 거예요. 내 주제도 모르고. 감히 박완서 작가 글을 보고 자괴감이라니, 아니 내가 그만큼 고민하고 시간을 투입하지도 않았거든, 아직까지는. 그런데 또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니까. 나도 참, 할 수 없는 사람인가 봐요. 우짜겠노? 그죠?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짧은 소설이라고 얘기는 현주 씨에게서 들었는데 진짜 31페이지짜리네요. 지하철에서 한 시간 만에 다 읽었쓰. 근데 겨우 31페이지짜리 단편소설을 다 읽고 지하철 안에서 다른 생각을 못하겠는 거예요. 소설의 주인공 엄마의 심정이 절로 느껴지는 거라. 현주 씨도 딸이 있잖아! 이제 5살 됐나요? 아이고, 언제 다 키우겠노? 근데 그때가 젤로 이쁠 때 긴 해요. 좀 더 크면 말도 안 듣고 속만 썩이고. 어리면 어린 데로 걱정, 크면 큰 데로 걱정. 자식은 정말 걱정덩어리요, 웬수덩어리인 것 같네요. 소설 속 주인공의 친구, 왜 아들이 사고 나서 치매에 하반신 마비까지 온 자식을 돌봐주는 친구가 그러잖아요 자식 보고 '아이구 이 웬수, 저놈의 대천지 웬수' 누구라도 자식이 반신불구가 되어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겠죠? 근데 이 엄마는 자식이 웬수이긴 해도 또 살아가는 원동력이 아니었을까요? 모르겠어요. 내 입장을 거기에 대입해보면 나도 분명 '대천지 웬수야!'라고 했을 것 같긴 한데, 마냥 또 진짜 부모 죽인 원수 같은 원수가 아니라 이것을 두고 혹여라도 내가 먼저 세상을 뜨게 되면 남아서 엄마 애간장을 끓일 것이니 그래서 걱정시키니 웬수라고 했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근데 주인공은 친구와 하반신 마비 아들의 대화와 행동을 보고 끝내는 대성통곡을 하잖아요? 그 심정도 어렴풋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나는. 나름 민주화 운동하다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고 민가협을 따라다니며 시위도 하고 뭐가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자식은 생때같은 내 새끼가 내보다 먼저 죽은 거라. 그 속이 속이었겠어요? 그렇지만 남들 보기에는 꿋꿋이 잘 이겨내고 있다고 생각하게끔 하고 싶었을 거예요. 왜냐면 내 새끼는 의로운 죽음을 한 거니, 엄마도 의로워야지. 적어도 의로운 척은 해야지, 괜찮은 척해야지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러다가 그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이 됐을 수도 있겠죠. 나는 괜찮다. 하고. 그러다가 친구와 아들의 스스럼없는 서로 욕도 하고 어린장도 부리는 모습을 보고는 가슴을 꾹꾹 눌러왔던 쇳덩이 같은 의연함이 뜨거운 불에 쇳물처럼 녹아버려서 그 뜨거운 철이 용암처럼 흘러내린 거 같아요. 뜨거운 용암이 아마 주인공의 통곡해마지않는 눈물과 울음이었겠죠. 내가 그 입장이라고 생각하니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나더란 말입니다. 지하철에서. 사람 복작거리는 지하철에서 서서 책 읽다 천청을 한번 쳐다보고 눈도 몇 번 깜빡거리고 끝내는 손가락 끝으로 눈가를 찍어냈다 말이죠. 참, 나이가 드니 눈물만 흔해져서. 이건 뭐 밖에서 영화나 책을 함부로 볼 수도 없어. 감정을 메말라 가는데 눈물만 많아지는 것 같아요.

   아이고, 잡소리가 많아졌네요. 현주 씨에게 이렇게 전화한 거는 그냥 좋은 책 추천해줘서 고맙다고 할 요량이었는데, 용건만 간단히 말할라 했는데, 시간을 너무 많이 뺏었네요. 근데 우리 사이 이 정도 괜찮잖아? 안 그래요?   근데, 현주 씨 여기서 말하는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이 뭘 말하는 걸까? 자식일까? 모성일까? 자존심일까? 아직까지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우리 다음번에 오프라인으로 독서모임하면 이것도 꼭 같이 얘기해봐요.

   오늘은 이만 자야겠어요. 현주 씨, 밤늦게 미안해요. 자기도 이만 그만 자요? 뭐 애가 잘 생각을 안 한다고? 우짜겠노? 이래서 애 키우기 힘든 거라. 내 시간이 내 꺼가 아이잖아요? 쯧 건투를 빌게요. 현주 씨도 아이도. 나는 고만 잘라요. 잘 자요. 안녕.

  

*소설이 전화체로 쓰여 이를 모방하여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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