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 개인과 사회의 사이에서
1987년 6월 항쟁이 끝나고 그 해 말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씨가 당선이 되었다. 곧 고3 수험생이 될 나는 대입 학력고사를 없애주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대학생이었던 친구 옥희의 오빠는 마치 방구들을 무너뜨리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손으로 방바닥을 쳐대며 울분을 토해냈다. 옥희 오빠와 같은 사람이 대학가에는 많이 있었던가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고 새 대통령이 뽑혔는데도 대학교에서는 데모가 계속되었다. 이런 분위기가 한창인 1990년에 나는 시골 마을에서 도시에 있는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을 했다.
대학은 새로운 것 천지였다. 등교시간도 하교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캠퍼스는 도심 공원 같았고 따로 뚝 떨어져 있는 건물은 어디가 어딘지 찾아가기도 힘들었다. 선배들은 친절했고 동기들은 풋풋했다. 교내 곳곳에 ‘새내기 환영’ ‘동아리 회원 모집’같은 플랫카드와 대자보가 게시판과 건물 벽과 심지어 건물과 도로 바닥에까지 붙어있었다. 한편에서는 ‘노태우 정부 타도하자!’고 함성을 외치는 데모하는 학생들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었다. 시골 조그만 고등학교에서 와서 챙겨줄 동문선배도 없던 나는 푸르른 캠퍼스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채 외로움을 느끼며 방황하는 티를 팍팍 내고 다녔다. 그렇게 3월이 거의 다 지나갈 무렵 단과대학 건물 앞을 막 지나고 있었는데 정문을 막 나서는 학과 학생회장 선배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 홍월아, 학교생활 재미있제? 그래도 시간되면 과학생회실에 가끔 놀러 와라. 밥 사주께.”
‘밥’이라는 단어는 마법사의 주문이었다. 선배가 ‘밥 사주께’라는 주문을 내뱉는 순간 나는 이미 선배에게 포섭되어 버렸다. 선배는 매직 넘버 180cm를 넘는 키와 뾰족한 턱선, 금테 잠자리 안경을 썼는데 이미라 만화 <인어공주를 위하여>에 나오는 푸르매에게 안경을 쓰면 바로 선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해서 나는 종종 과학생회실에 출입하는 신입생 중 하나가 되었다.
대학 1학년의 4월은 4,3과 4.19와 함께 후다닥 지나갔다. 그리고 일 년 중 학생과 학교와 관할 경찰서가 가장 긴장하는 5월이 되자마자 학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선배들이 속닥거리는 모습이 자주 내 눈에 띄었다. 뭔가 작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쯤은 신입생이었음에도 눈치 챌 수 있었다.
디데이는 1990년 5월 9일이었다.
그 날은 1월에 합당을 발표한 민정당, 공화당, 민주당의 세 정당이 민자당이라는 이름으로 창당식을 하는 날이었다. 이날 전국의 대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였다. 우리 대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선배들이 며칠을 계속 속닥거리고 긴장된 시선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5월 9일 이른 오후, 우리는 과학생회실 좁은 방에 학생이 모였다. 칠판에는 ‘침묵. 말하지 마시오. 프락치 조심’이라는 글귀가 있었다. 나는 ‘프락치? 아, 뭐고? 이건 내 분위기 아인데‘하면서도 칠판 앞에 서있는 선배를 보며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선배는 칠판에 오늘 오후에 있을 거리 투쟁, 가투 계획을 써내려갔다. 칠판에는 연인으로 위장을 위해 남녀 1명씩 짝을 지워 집결 장소에 시간을 맞춰 모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가는데 선배가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오늘, 잘해 보자.” 내 심장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대기 시작했다. 프락치니 거리 투쟁이니 하는 말들은 선배의 말과 함께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다.
첫 집결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선배와 나는 4시쯤 서면역에 내려 동보서적에 들어가 책을 보는 척 하였다.선배는 가끔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향해 눈짓과 고갯짓을 했다. 나는 낯선 곳에 간 강아지마냥 선배 옆에서 붙어 있었다. 이게 웬 넝쿨째 굴러온 작업의 기회냐, 라고 생각하면서.
5시 15분전 우리는 서면로터리로 향했다. 침묵으로 작전을 짜고 둘 셋씩 다녔는데도 길거리에 백골단과 전경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공권력의 정보력에 감탄을 하였다. 5시가 다가오자 나는 난생 처음 해보는 가투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듯 100m 달리기를 20초에 주파하는 나는 길거리에서 무섭게 생긴 백골단들에게 잡힐 것 같았다. “선배, 저 달리기를 너무 못해서요. 저 때문에 선배 힘드실 건데요.” 무서워서 도망가고 싶은 마음과 선배랑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뒤섞인 채 묻는 나에게 선배는 말없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넘어지지만 마라. 책임지고 잘 데리고 다닐게.” 선배의 말에 도망하고픈 마음은 어느 새 사라지고 손의 촉감만 남아 있었다. 5시가 되었다. 삐~익~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호루라기보다 더 날카롭고 우렁찬 목소리가 서면 거리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3당 합당 자행하는 민자당을 타도하자!!”
구호를 신호로 서면 로터리 구석구석 숨어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뛰어나왔다. 범내골부터 서면 로터리까지 긴 도로가 시내의 모든 대학생이 다 나온 듯 1~2분 만에 인파로 점령당했다. 인도의 전봇대 옆에서 서있던 나는 선배의 손에 이끌려 거리로 뛰쳐나갔다. 서면 로터리를 점령한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선배는 내 손을 잡고 도로 한가운데로 나섰다. 나는 ‘도망치기 좋게 길가에 있었으면’하는 마음이었지만 내 손에 전해오는 선배 손의 온기와 아스팔트 위를 뒤덮은 사람들의 열기에 내 마음은 눌려 버렸다.
서면 일대는 온통 사람천지였다. 20살이 되기 전까지 내가 본 군중은 중고등학교 졸업식이거나 초등학교 운동회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1990년 5월 9일 오후 5시 서면 시내는 내가 본 가장 많은 군중이 모였는데 10만 명은 넘어 보였다. 내 달리기 실력으론 달리다 넘어져 깔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3당 합당 자행하는 민자당을 타도하자” 날카로운 목소리가 선창했다.
“3당 합당 자행하는 민자당을 타도하자” 거리에 있는 다양한 톤의 함성이 날카로운 소리를 따라했다. 나도 선배 옆에서 왼팔을 하늘위로 어설프게 뻗으며 들리듯 말듯 선창 소리를 따라했다. 오른손은 선배 손안에 얌전히 포개져 있었다. 역사책에서 보던 군중과 TV 뉴스에서 들었던 함성 속에서 나는 실제로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역사의 한 장속에 있다고 느꼈다.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가 군데군데서 들리고 대오가 조금 흐트러졌다.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까치발을 하고 고개를 기웃거리니 키 큰 선배는 무심한 듯 말했다. “저 앞에 전경이랑 백골단이 좍 깔렸다. 페퍼포그도 벌써 몇 대 왔네. 오늘 날 잡았네.” 전경에 백골단에 페페포그까지! 나는 오늘 깔려 죽든 질식해서 죽든 최루탄에 맞아 죽든 아무튼 무사하지 못할 것이었다.
잔뜩 졸아있는데 앞에서부터 와~~하는 함성이 연이은 파도타기를 하였다. 제일 앞줄의 선창을 따라 뒤이은 기다란 대오들은 노래도 부르고 구호도 외쳤다. 대학생들이 부산 시내 한복판에서 시민들에게 3당 합당의 부당함과 민자당 타도를 외친 것은 불과 20여분. 20분쯤 지난 후 두려워하던 일이 벌어졌다.
파팍팍팍팍팍!!!!! 파팍팍팍팍팍!!!!! 파팍팍팍팍팍!!!!! 페페포그에서 몽글 몽글한 하얀 것이 터져 나와 뭉게구름처럼 퍼져나갔다. 나는 숨쉬기 어려웠고 선배는 내 손을 이끌고 어디론가 내달렸다. 부산 지리를 모르던 나는 손에 이끌려 따라갈 뿐이었다. 이 골목으로 저 골목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라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때에야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최루가스에 호흡이 가빠진 내게 치약이 묻은 손수건을 건너 주면서 선배는 경계가 가득한 눈짓과 표정을 하며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선배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뒤로 몸을 돌려 다시 왔던 길로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방금 저쪽에 백골 애들 서넛이 서있더라. 딴 데로 가자” 선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나는 다시 온몸이 떨렸다. 주변에 ‘짭새’나 프락치가 있을지도 모른다면 선배는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리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나는 심장이 나대는 것이 최루가스 때문에 산소량이 부족해서인지 내 어깨에 있는 선배의 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면 일대를 헤매던 우리는 곧바로 다음 장소로 직행하였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던 중 몇몇 사람들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지만 선배는 정중하게 무슨 말씀인지를 하며 데이트 커플인 듯 행동하였다. 궁금해 하는 나에게 프락치일 가능성이 있으므로 확실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아는 체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였다. 나는 마치 첩보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음 시위 장소인 남포동에 도착하였다. 시위 시작까지 약 15분이 남아있었다. 손에 땀이 고여 끈적거렸다. 15분 동안만이라도 손에 땀을 닦고 긴장을 풀고 싶었는데 선배는 5시에 서면에서 잡은 손을 아직까지 놓지 않고 있었다. 손을 뺄까말까 갈등하는 사이 선배는 손을 빼고 땀을 닦더니 이내 내 손을 잡았다. ‘이 선배 뭐지? 나를 좋아하는 건가?’ 그 순간만큼은 엄중한 시국보다 내 손의 안녕이 더 문제였고 내 눈앞의 남자가 더 관심사였다.
“3당 합당 자행하는 민자당은 자폭하라” 7시가 되었다. 이번에는 굵직한 바리톤의 남자 목소리였다.
15분정도 거리에서 사람들을 따라 구호를 외치던 나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면 선배 손에 이끌려 남포동 뒷골목으로 냅다 달렸다. 대규모 시위가 불가능해진 학생들은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같이 구호를 외쳤고 그 소리가 울려 퍼지기가 무섭게 경찰들이 달려왔다. 학생들은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시간은 어느덧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내 손은 계속 선배 손안에 포개져 있었다. 처음엔 손잡고 나란히 걸었는데 체력이 떨어진 나는 선배보다 두어 걸음 뒤처져 걸었는데 이건 마치 산책 나왔다가 집에 가기 싫어 주인에게 억지로 끌려가는 강아지 같았다. 터덜거리며 걷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선배는 “이제 그만 뒤풀이나 하러 가자.”며 우리 과 사람들이 시위 후 항상 가는 포장마차로 향했다. 남포동과 국제시장 사이 그 어디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우리는 걸었다. 선배는 남포동 큰 도로에서 시위할 때도 흩어져서 골목에서 소규모 시위를 할 때도 내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 시위가 끝나고 식당을 찾아가는 길에도 선배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이제 달릴 일도 없는데 손은 놔도 될 텐데. 먼저 손을 놓자고 할까? 아니면 그냥 말없이 손을 뺄까?’ 쫓기는 달리기를 멈추니 다른 종류의 두근거림이 시작되었다. 여태껏 손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는데 왜 손을 놓지 않는지 궁금했지만 왠지 모르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이제 그만 손 풀어요. 라고 내가 말했는데 그가 ‘어, 그렇군.'하고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하면 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손잡고 있는 거 나는 좋은데’라는 대답이 한다고 해도 나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행동을 하지 못하고 그냥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포장마차 앞이었다. 먼저 와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선배, 동기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반갑기도 했고 이제 선배와 단 둘이 있는 시간은 끝이라는 생각에 아쉽게도 했다.
“마지막 팀까지 왔네. 수고했다.”
“오, 뭐야? 왜 둘이 아직까지 손잡고 있어?”
이 말이 나오자마자 여자 선배들과 동기들이 일제히 여태 손을 잡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모두들 나는 이 상황이 매우 궁금하다는 것으로 눈과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은근히 선배의 대답을 기대했다.
“홍월이가 달리기를 못한다네. 넘어져서 잡힐까봐 하루 종일 불안했네.”
나는 오후 내내 이런 저런 고뇌와 상상으로 땀 꽤나 흘린 내 손이 불쌍해졌다. 선배도 조금은 나를 마음에 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내 착각이었던 것이다.
남포동 투명 비닐 포장마차에서 자정이 넘도록 5월 9일의 시위에 대하여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새벽이 되어서야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각자의 방법으로 그날 하루를 갈무리했다.
그 날 이후 나는 분홍빛 편지나 단 둘만의 만남 같은 상투적 절차를 조금은 기대했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캠퍼스의 로맨스는 <사랑이 꽃피는 나무>속에서만 존재했고 나에게는 손 안의 끈적이는 느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메인사진은 영화 <1991, 봄>의 한장면을 사용한 2018년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