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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월 Apr 05. 2021

위화 - <인생>


주인공 푸구이 노인은 자신의 소 '푸구이'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푸구이' 소는 푸구이노인이 길고도 짧은 삶의 끄트머리에서 겨우겨우 모은 돈을 주고 산 늙은 소였다. 푸구이 노인의 유일한 가족은 푸구이 소뿐이었다.

"푸구이는 괜찮은 녀석이야. 간혹 몰래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뭐 사람도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는데 소야 더 말할 게 있나. 나는 놈한테 언제 일을 시켜야 하고, 언제 쉬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내가 피곤하면 그놈도 피곤할 테니 쉬게 하면 되고, 내가 좀 쉬고 나서 정신이 들면 놈도 일할 때가 된 거야." - P282


한동안 읽지 못했던 종류의 소설이었고 요즘은 잘 출판되지 않는 종류의 소설이며 많이 그리워하고 있던 종류의 소설이었다. <인생>은. 지금은 거대한 사회 담론을 이야기하고 역사적 사명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개인의 고민과 담론이 부각되는 세상이라 세상의 흐름에 꼬여가고 흘러가는 인간의 역사를 다룬 것은 적어도 내 눈에는 별로 띄지 않았다. 물론 그런 콘텐츠가 왜 없었겠냐마는, 그저 나도 내 인생과 내 고민에 빠져 열심히 찾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손에 잡게 된 위화의 <인생>은 대하소설류를 좋아하는 나에게 한동안 채워지지 못했던 역사와 개인의 삶을 만나게 해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그 속에서 한참을 숨 쉬게 해준 소중한 책이었다.



모름지기 모든 이야기-그것이 동화이든, 소설이든, 위인전이든-의 주인공은 역경을 만난다. <인생>의 주인공 푸구이도 다르지 않았다. 푸구이는 인생의 온갖 맛을 다 맛보면서 살았는데, 쓴맛은 아주 오래도록 길었으며 여러 차례의 매운맛은 매번 길들여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했고 평생을 짠맛과 함께 하며 그 짜기의 정도를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단맛은, 쓰고 맵고 짠맛에 익숙했던 푸구이에게 순간의 단맛은 너무도 달콤했다.


푸구이 노인이 인생의 쓴맛, 매운맛, 짠맛, 단맛을 다 맛보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중국의 현대사와 관련이 있다. 일본이 대동아전쟁이라는 이름 아래 온 아시아를 침략하던 그 시절 자란 푸구이는 자신의 노름빚 때문에 지주에서 소작농으로 신분이 하락되었다. 어느새 일본이 패망하고 중국의 공산당과 국민당이 나라를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던 그때, 푸구이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의사를 구하러 가던 중 강제로 국민당 군대에 끌려가게 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국민당의 군인이 되어 굶기를 밥 먹듯 하였고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를 향해 총을 쏘던 푸구이는 자기의 군대(국민당)이 졌음에도 마침내 여비를 얻고 따뜻한 만터우까지 얻어먹고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고향에서 자신의 집과 땅을 노름으로 가져간 룽얼이 공산당으로부터 총살당하는 것을 본 푸구이는 사람의 인생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운명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눈. 코. 뜰 새 없이 일만 하지만 늘 먹을 것은 부족했고 국가는 자꾸 무언가를 갖고 가기에 바빴으며 쌓이는 내 것은 없었다. 어이없는 일로 아들도 죽고, 아이를 낳던 딸도 죽고, 늘 연약하던 아내도 끝내 숨을 거두었다. 딸이 죽은 후 혼자 손자를 기르던 사위도 사고로 죽고 남겨진 손자마저 푸구이 노인으로 인해 어린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사이 푸구이 노인의 나라에서는 대약진 운동이 일어났다가 슬그머니 사라졌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아무 이유 없는 목숨을 빼앗아 가더니 몇 년 후 또 사르르 사그러 들었다. 푸구이 노인은 중일전쟁을 겪었고 공산 혁명을 몸으로 살아냈으며 대약진 운동에 시름시름 앓았다가 문화대혁명 때 친구를 잃었다. 푸구이 노인은 중국 현대사를 겪어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떠나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는 그저 그 삶은 좌절하지 않고 충실히 살아왔을 뿐인데 격동의 시기에 태어나 살았다는 이유로 그의 삶은 뭉개지고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그의 삶이 뭉개지고 쪼그라들었다고 해서 그의 마음마저 뭉개지고 쪼그라든 것은 아니었다. 노름을 일삼고 가족을 일순간에 망하게 할 만큼 철이 없었던 푸구이는 그의 생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자신을 알 수 없을 크기만큼의 지혜를 갖게 되었다. 삶은 살아낸다고 해서 누구나 지혜를 갖고 현명해지는 것은 아닐 것일진대, 소설 속 푸구이는 스스로 이름 지은 '푸구이'라는 이름의 소를 대할 때조차 공자와 맹자 못지않은 현자의 태도로 운명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우리의 근현대사도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힐 정도의 답답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인즉슨, 나의 어머니 아버지, 내 할머니 할아버지도 푸구이 노인 못지않게 숨 막히고 가슴 답답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냈다는 것이다.

어릴 때 삶에 대해 능동적이지 못하고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던 엄마, 아버지가 답답하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다.

"왜 공부를 하지 않으실까?" "왜 우리 말을 듣지 않으실까?" "왜 그저 안될 거라고만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실까?" 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아마, 내 할아버지 할머니는 삶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태도가 더하실 수도 있었으리라

개인의 삶은 혼자서 따로 분리될 수 없다. 반드시 주변의 환경과 외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주변 환경과 외부 상황 중에서 가장 으뜸은 국가라고 하는 곳일 것이다. 개인의 삶의 질과 수준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것이다. 사주명리학을 하는 사람들 중에 간혹 이런 말을 하시는 분이 있다.

"사주의 좋고 나쁨은 실은 어느 나라에서 태어났는냐,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느냐가 좌우한다. 같은 사주라도 북한에 태어난 사람과 남한에 태어난 사람은 그 사주와 운명의 질이 다르다. 즉 주위 환경이 그만큼 중요하다."


1930~40년대에 태어나서 순사 같은 공권력의 공포를 일찍이 맛보았고 십대가 하필 1950대년라 빨간 노이로제에 걸렸으며 나이가 차면 결혼해야 한다는 관습에 하필 60년대에 결혼을 하여 자신은 물론 새끼에게도 밀가루, 옥수수죽만 먹여야 했고 70~80년대에 들어서야 흰쌀밥을 먹어보기는 했지만 속 깊은 이야기를 시원하게 해볼 수 없던 시기-이런 격동의 현대사를 우리 엄마, 아버지는 푸구이같이 있는 그대로 살아내었다.



푸구이라는 사람의 인생살이를 읽으면서 엄마의 인생과 아버지의 삶이 오버랩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대한민국보다 중국은 더 다이내믹하고 역동적인 현대사를 가지고 있으니 비록 글로나마 읽는 것이지만 푸구이 노인의 삶에 안타까움과 가슴 미어짐이 마치 우리 부모님의 것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박경리 이후 그리고 조정래 이후 우리나라에서 이런 시대와 개인의 삶이 동반되는 작품을 내가 읽은 적이 있었던가? 내가 모르는 건지 아니면 작품의 존재가 미미한 것인지, 당장 퍼뜩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그래서 오랜만에 좋아하는 류의 소설을 읽은 맛은, 김치통에서 일 년 넘은 잘 삭은 묵은지를 꺼내 고기랑 같이 잘 익혀진 묵은지찜을 먹은 것처럼 든든했고 마음불렀다.



알고 보니 위화의 <인생>은 중국의 유명 영화감독 장예모가 감독하고 공리가 주연한 영화로 만들어져 1994년에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최우수 남우주연상과 같은 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명작 영화였다. 책만큼 영화도 잘 만들어졌나 보다. 찾아보니 넷플릭스와 왓챠에는 영화가 없고 유튜브와 U+영화에서는 찾을 수가 있었다. 영화도 곧 보아야겠다.



<인생>은 1993년도에 중국에서 출판되었다. <인생>을 잘 뜯어보면 모택동이 이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때문에 중국 민중들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삶이 고단해졌는지 푸구이의 인생을 보면서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나는 <인생>을 읽는 동안 생각했다. 과연 이 책이 2021년 현재 중국이라면, 출판될 수나 있었을까? 과연 푸구이 노인의 인생이 사실 그대로 그려지기나 했을까,라고. 지금의 중국은 1993년 막 문호를 개방한 당시의 중국, 20년 전의 중국보다 오히려 문화적으로 사상적으로 퇴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국을 보면, 이해와 관용은 전혀 없는 '오로지 나'만을 제일이고 유일하다고 외치는 그릇된 신념을 가진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람이나 집단이 독실한 신념을 가졌는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스스로에 대한 지적과 반성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중국이라면 위화는 아마 <인생>을 출간하지 못했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제발 나의 오해이기를.



푸구이 노인은 굴곡진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쨌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터득하였다. 간혹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언제 일해야 하고 언제 쉬어야 하는지 이제는 깨달은 현자이다.

지금의 나는 아직 나를 잘 모르겠다. 여전히 찾고 있고 길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푸구이 노인만큼 살았을 때, 그처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홍월이는 괜찮은 녀석이야. 간혹 몰래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지만, 뭐 누구나 간혹씩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겠나. 홍월이는 언제 일을 해야 하고, 언제 쉬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피곤하면 쉬면 되고, 쉬고 나서 정신이 들면 일할 때가 된 거야. 홍월이는 썩 잘 살아왔어. 아암, 그렇고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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