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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살도 질풍노도의 시기입니다.

아직도 진행중인 나 자신을 알아가기

by 홍월

思春期

질풍노도>>

몹시 빠르게 부는 바람과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큰 물결 혹은, 18세기 후반 독일에서 일어난 문학 혁명 운동(슈투름 운트 드랑). 합리주의, 계몽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감정의 해방, 개성의 존중 및 천재주의를 주장하였다.


17살 고등학교 1학년 국어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국어 선생님한테서 질풍노도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무슨 문학작품을 이야기하다가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아무튼 선생님은 질풍노도라는 단어를 아주 강조하였으며 시험문제도 내었다. 그때 선생님은 청소년과 사춘기를 대표하는 단어가 질풍노도이며, 지금 너희들은 질풍노도의 시간 한가운데에 있는 격정적인 시기이다, 는 말을 했다. 나는 질풍노도라는 단어가 아주 맘에 들었다. 왠지 있어 보였다. 나는 그때 내가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 있는지 딱히 느껴지지 않았지만 부모님이나 사회가 정한 사소한 규칙을 어길 때면 "어, 지금 나 질풍노도"라는 말로 설득과 이해를 얻어내곤 했다. 그러면 그때는 웬만한 심각한 사건이 아닌 다음에야 다들 이해하고 수긍해주었다.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한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오랜만에 보니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하지만 안부를 묻는 십 여 분이 지나고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이랬다.

"너거 신랑 회사는 잘 돌아가나?" "니 지금 하는 일은 잘 되나? 몇 살까지 할 수 있겠나?" "그거 안 하면 뭐하고 살 건데?" "앞으로 뭐하고 살면 될까?"

남자든 여자든, 직장이 있든 직장이 없든, 자영업을 하든 프리랜서를 하고 있든 간에 모두의 화두는 '이제 잎으로 뭐하고 살 것인가'였다.


주변에서 들리는 경조사는 이제 대부분 부모님의 부고 소식이다. 노환으로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연세는 80 중반부터 90 후반까지였다. 선생님들이 우리더러 질풍노도라고 하던 시절 우리나라의 평균 기대 수명은 대략 70세 정도였으니 지금과 비교해보면 인간의 기대 수명은 우리나라 출생률이 떨어지는 폭만큼 반비례로 급격히 올라가고 있다. 진행되는 의학의 발달과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으로 볼 때 나는 100살까지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겨우 인생의 절반을 산 셈이다. 살아온 것만큼의 시간을 더 살아야 한다. 하지만 지난 50년은 다가올 50년과는 분명히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미래는 어떤 일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미래를 대비하려고 이것저것을 뒤적거려본다. 여기저기를 기웃거려 본다. 뭔가가 마뜩잖다. 나는 아이들에게 늘 하던 잔소리를 나에게로 되돌려 본다.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해. 니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하고 좋은 찾아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한 순간, 나는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여태까지 내가 무엇을 진짜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자신도 잘 모르는 내가 아이들에게 '자신을 먼저 알고 좋아하는 것을 탐구해라'라는 하늘에 떠있는 썩은 동아줄 잡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 공허한 잔소리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가당찮게 들렸을 것인가.


지난 2년 동안 나는 내가 아주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었던 분야를 웬만큼 집적대 보았다. 그중에 온전히 내 맘을 사로잡은 것은 아직 없다. 원래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요즘 대세라고 하는 SNS, 온라인을 꼭 알아야 된다고 해서 관련 콘텐츠를 구독하고 강의도 들어보았다. 온라인은 세상의 대세이긴 해도 나 세상이 되기에는 내 그릇이 아직 작다. 아직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도 들여다보아야 할까. 그래야, 더 수많은 것들을 접해보아야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이곳저곳을 집적대는 사이 내 생각보다 내 그릇의 크기가 큰 된장독이 아닌 간장종지만 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모르던 것을 남들이 이미 시작하여 저 멀리까지 나아가 있는 것을 보면 덜컥 두려움이 생겼다. 같이 시작했는데 나만 뒤처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너무 초라해진 나를 들키기 싫어서 '재미없다'는 핑계를 대며 그만둔 적도 있다. 내가 잘하는 건 줄 알았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우물 안 개구리임을 알았을 때는 그만두고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지, 못 먹어도 GO 할지 고민에 빠졌다. 시작은 했지만 재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조차 모호한 것도 있다. 이게 재밌는 건지 지루한 건지를 내가 모른다면 누가 답을 줄 수 있을까.


오늘 아침 단체 톡방에서 한 친구가 톡을 남겼다. 길을 잃었다. 뭐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길이 맞는지 답답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톡을 읽는 순간, 나는 내심 기뻤다. 나만 방황하는 게 아니다. 나만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니었다. 동지를 만난 기쁨인지, 혼자 뒤처지지 않았다는 이기적인 안도감인지. 기쁜 내색을 감추고 '원래 잘하시는 분이 왜 이러세요. 힘내세요. 파이팅'이라는 상투적인 인사말을 남겼다. 아, 인간이 도대체 왜 이러나. 간장종지마저 밥 숟가락으로 변할 지경이겠다.


국어 선생님은 틀렸다. 질풍노도는 더 이상 17살이 아니다. 지금은 꺾어진 백 살도 빠르게 부는 바람과 소용돌이치는 물결인 질풍노도를 겪고 있다. 17살들이 푸르른 녹음을 펼치기 위해 봄을 고뇌하듯이(사춘기/思春期) 오십 즈음은 황량한 겨울을 대비하기 위하여 가을에 방황한다. 나는 방황하는 사추기(思秋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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