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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yoo Feb 09. 2023

나의 첫 지리산

100대 명산 산행기 : 웅장함 속 느껴지는 푸근함

2월 5일 새벽 12시에 떠난 지리산. 작년 가을 총 28명으로 버스까지 대절해 다녀오기로 한 지리산이 태풍으로 인해 취소되었다. 너무 아쉬운 마음에 몇 주 뒤 설악산을 다녀왔고, 드디어 올해 나의 첫 지리산을 다녀왔다. 이전부터 천왕봉 정상석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드디어 실물로 볼 생각에 설레었다.


서울에서 지리산까지 약 3시간 30분을 달려 들머리인 백무동에 도착했다. 총 13명의 인원과 함께 채비를 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백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


이제는 날이 좀 풀린 줄 알았는데 아직 겨울은 겨울이다.. 초입에는 눈이 없었으나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얼어 있는 구간들이 보이고 손이 너무 시렸다. 10분 간의 휴식을 취한 후 올라가는데 손 체온이 돌아오지 않아 약간 당황했다. 가장 빨리 체온을 올리는 방법은 열감이 있는 아랫배나 등에 손을 대는 것이라고 등을 선뜻 내어준 우리의 리딩자 샛별언니 덕에 체온이 돌아왔다. 그리고 붙이는 핫팩을 건네주신 현아언니도! 항상 감사합니다.


새벽 7시가 지나니 햇빛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앙상한 가지 위로 눈이 듬성듬성 덮여있는 산을 보니 자꾸 설악산이 생각났다. 장터목 대피소까지 2.8km


잘 정비된 돌계단에 최근 지어진 계단까지 더해져 정상까지 딱히 험한 구간은 없다. 다만 대피소 도착 30~40분 전에는 눈으로 뒤덮이거나 얼어있는 구간이 많아 결국 아이젠을 꺼내 착용했다. 아이젠만 착용하면 훨씬 안전할 텐데 가방에서 아이젠을 꺼내 꼈다 뺐다 하는 일이 왜 이리 번거로운지... 그래도 부상 없는 산행을 위해 조금의 번거로움을 참고 다 같이 꼈다. 이제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을 때쯤 장터목 대피소가 보인다. 대피소 너머로 보이는 뷰가 참 좋았다. 대피소 내에서는 아이젠 착용이 금지되어 있어 아이젠을 빼며 뷰를 감상하고 들어갔다.



장터목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 데크에서 바라본 뷰
데크 옆에서 바라본 대피소


속도가 조금 빠른 멤버 8명은 먼저 대피소에 도착해 불을 올려놓기로 한다. 대피소에서는 화기 사용이 가능해 사골 진액과 만두피, 그리고 고기를 챙겨갔다. 산 위에서 먹는 고기는 정말 꿀맛 그 자체다. 게다가 대피소에서 식사를 끝내신 분들이 남은 허브솔트와 파, 고추 등을 나누어 주셔서 더 풍성한 한 끼가 되었다. 


등산객분들 중에 따뜻하신 분들이 참 많다. 밖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약간의 경계를 하기 마련인데, 산에서는 어떠한 편견도 없이 상대를 대할 수 있다. 마주치면 인사를 하고, 음식을 나눠 주고, 서로를 격려해 줄 수도 있다. 산에서 받는 기운도 물론 있겠지만, 함께 하는 산우들과 오고 가며 마주치는 등산객들로부터 받는 에너지도 있는 것 같다.


대피소에서 구워 먹은 삼겹살과 목살. 예주님과 종화님 커플이 맛있게 구워주셨다.. 감사합니당


요리를 준비하고, 굽고, 끓이고, 또 정리하는 시간까지 더해져 두 시간이라는 시간이 대피소에서 후딱 지나갔다. 고기와 밥, 김치, 파, 마늘 등이 남아 미리 굽고 볶아 식힌 후 지퍼백에 보관했다. 하산 도중 허기가 지면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볶음밥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 볶음밥의 대부분은 내 뱃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하산 길 로타리 대피소에서 야무지게 먹은 볶음밥


이제 슬슬 채비를 끝내고 천왕봉으로 오르기 시작한다. 애초에 시간을 여유롭게 잡아 급할 건 없지만, 너무 지체되면 하산 시 야등을 해야 할 수도 있기에 움직이기로 했다. 설악산 대비 힘들지는 않았지만 정상에 다다를수록 가방이 점점 무겁게 느껴졌다. 대피소에서 생각보다 물이 충분해 비우지 못했는데 하산까지 파워에이드 한 병으로 버텼다. 여럿이 오는 산행이 아니라면 겨울엔 역시 물은 적당히 챙겨야겠다.


곳곳에 보이는 고사목(枯死木)


대피소를 나와 올라가다 보니 고사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나무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얼마나 오랜 세월을 견뎠을지 생각해 본다. 또 최근 기사에서 크리스마스트리로 유명한 '구상나무(Abies Koreana)'가 사실 한국 고유의 수종이라는 점과, 지리산과 같은 해발고도 1200m 이상의 산에만 서식한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혹시 저 나무가 구상나무는 아닐까?라고도 생각해 보았다.


이런 귀한 나무가 최근 기후위기로 인해 10년 전부터 집단 고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후면 구상나무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으로도 전망하고 있다. 너무 안타깝다..


참고 기사:

지리산 천왕봉은 무덤이 됐다…하얗게 죽어간 구상나무들 : 환경 : 사회 : 뉴스 : 한겨레 (hani.co.kr)


맨 아래 나무가 혹시 구상나무는 아닐까? 올라가며 제대로 볼 걸 그랬다..


가다 보니 전망대가 하나 나온다. 잠시 숨을 돌리며 몇몇은 사진을 찍고, 몇몇은 다른 등산객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뒤에 오신 두 분이 커플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성을 빼고 이름이 같으셨다. 이름도, 취미도 같은 커플이라니 너무 신기했다! 


잠시 쉬다 문득 지리산까지 왔는데 사진 몇 장은 건져야지 라는 생각으로 사진을 찍었다.


전망대 앞에서 찍은 이날의 베스트 컷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정상을 올랐다. 다들 재빠르게 정상에 도착했는데 막바지에 가서 조금 지쳤다. 가방도 무겁고, 잠시 숨을 고르고 가고 싶어 가방을 내려놨는데 샛별언니가 기다려주며 사진을 찍어주셨다. 보통 정상석 바로 전에는 깔딱 고개가 많아 힘든데 이 길은 아주 편안했다. 다만 내 체력이 안 되었을 뿐.


가을에는 설산을 그리 가고 싶었는데.. 막상 겨울이 되니 너무 춥고, 챙길 장비들도 많아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빨리 모자도 안 쓰고, 레이어링도 최소화할 수 있는 봄이 되었으면..! 이렇게 사람이 간사합니다.



해발 1915m, 지리산 천왕봉


천왕봉 바로 아래에서 바라보는 풍경, 그리고 나



처음 올라왔을 때는 한적했는데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아쉬웠다. 올라오자마자 빨리 사진을 찍었어야 하는데, 찍다 보니 뒤에서 재촉하기 시작. 흑. 그래도 주말치고는 없었던 편이라 몇 번 줄을 선 끝에 하나는 건졌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정상석 바로 앞이 절벽이라 사진 촬영 도중 발을 헛디디거나 중심을 잃으면 다칠 수도 있어 보였다.


한 가지 재밌는 일화로는 단체 사진을 찍으려고 다 같이 정상석 주변에 둘러앉았는데, 웃기게도 찍어줄 사람을 섭외하지 않았다. 찍힐 대상은 있지만 찍을 사람이 없는 이상한 상황. ㅋ.ㅋ 한바탕 웃고 주변 분들에게 부탁해서 촬영을 완료했다.



로타리 대피소, 순두류 방면으로 하산



하산길은 다행히 험하지는 않았지만 높은 계단과 암릉, 그리고 얼어있는 구간들이 있어 마냥 쉽지는 않았다. 정상에 오를 때와 비슷한 속도로 내려가다 마지막에 속도를 내 순두류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인당 2천 원을 내고 남은 거리를 편히 버스로 중산리 탐방지원센터 주차장까지 갈 수 있었다. 여유롭게 정류장에 도착해 기다리기 위해 막바지에 속도를 냈더니 땀을 꽤 뺐다. 힘들어서 사진 찍을 힘이 남지 않았나 보다. 하산 바로 직전까지는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세 시간 동안 서울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주 꿀잠을 잤다..


첫 지리산은 운이 좋게도 바람이 불지 않는 맑은 날이었다. 이런 좋은 날 지리산을 오려고 작년에 오지 못했나 보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지만 역시 집에 도착해 씻고 누워 다시 사진을 보며 느끼는 뿌듯함에 다시 찾게 된다. 올해 지리산은 이걸로 끝!이라고 속으로 외쳐보지만 또 몇 달 뒤면 지리산행 차 안에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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