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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Feb 06. 2024

용서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보세요

동굴 속 이야기 다섯

히키코모리의 시간은 마치 타임머신과도 같은 감각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1년이 지나가고 자고 일어나면 또 1년이 지나간다. 기억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사진조차 없다. 그래서 회복되어 바깥을 나가게 된다면 매일을 사진으로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람이 적은 주택가와 산책로를 1시간 동안 걸어 한적한 카페에서 쉬다가 또 1시간 걸려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지만 히키코모리인 나에겐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기적 같은 일상이다. 그런 하루하루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구도하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다. 건강을 회복하는 나날에 작은 기쁨을 느낀다. 평온한 일상에서 마주치는 건 평온함에 어울리는 소소한 일들뿐이지만 작은 깨달음과 만족을 배워가고 있다. 그런 평온한 일상의 1월 16일, 17일의 일이다.




1월 16일은 전날 내렸던 많은 눈들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서 길 전체가 눈과 얼음으로 뒤덮였다. 낮엔 살짝 녹기까지 해서 난 몇 번이고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머릿속에선 '내일은 산책을 포기하자. 이건 핑계가 아니야. 다칠 것 같아!'라며 포기를 위한 핑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넘어진 그곳


1월 17일엔 비가 내렸다. 어제의 그 미끄러운 길에 비까지 내려서 도무지 산책할 상황이 아니다. 쉬고 싶다. 하지만 내가 나아가길 기대하고 응원하는 가족과 친구가 생각나서 억지로 나섰다. 자책하지 않을 정도만 걷고 돌아오자.


미끄러운 길을 핑계로 포기하고 돌아가려고 할 때쯤이다. 앞에서 걸어오던 할아버지가 지나가며 나에게 말했다. "저 위에 염화칼슘 뿌려서 길 싹 녹았어요". 내가 어딜 가는지 알고 말씀하신 걸까? 설령 내가 다니는 산책로라고 해도 그 두꺼운 얼음길이 녹았을 리는 없을 텐데.. 그래도 말 한마디 건네주신 게 감사해서 산책을 이어갔다. 정말로 녹았는지 확인만 하고 가자고 생각했다.


내가 포기하고 돌아가기로 생각했던 곳은 약간은 경사진 도로다. 고작 몇 미터 하찮은 경사로지만 산책을 포기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길 위의 얼음들은 모두 녹아있었다.

하찮은 경사로 : 산책을 지레 포기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계속 걸었다. 도로를 건너 산책로에 진입했는데 마찬가지로 얼어있어야 할 길이 녹아 있다. 조금 더 걸어보았다. 냇가 옆 산책로로 들어서니 초입부터 길 끝까지 얼음들은 전부 녹아 있었다. 결국 그날 난 끝까지 산책을 마쳤다.

산책로의 얼음들은 전부 녹아있었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떠올렸다. 작은 친절에서 던진 말 한마디는 얼음이 정말로 녹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지점까지 날 나아가게 만들었다. 미끄러움을 핑계로 몇 번이고 지레 포기하고 돌아갔을 내가 산책로 끝까지 걸어갈 수 있게 만들었다.




서울에 다녀온 후 회복에 힘쓰는 나날들을 보냈다(10년 차 히키코모리의 서울 나들이). 80% 정도는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여전히도 꽤 취약한 상태였다. 고작 하찮은 경사로를 핑계로 포기할 생각을 했다니 지금의 나로서는 당황스럽다. 불과 20일 전의 일인데 그때의 날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20일 뒤의 난 지금의 나를 이해할 없을 것 같다.


우울증 히키코모리는 매우 취약하다. 많이 회복되었음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하다. 나조차도 나의 취약성을 이해 못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히키코모리의 취약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가족분들은 취약한 모습이 이해되지 않으실 테지만 참을성 있게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되도록 그 취약한 부분에 대해서 소통을 하고 도움을 주셨으면 좋겠다. 작은 친절에서 던진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처럼 말이다.


히키코모리는 밑 빠진 독이다. 히키코모리는 독이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찬 순간 행동할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다. 매일 긍정의 에너지를 쌓아나갈 수 있게 가족과 주변에서 조금씩 도와줬으면 좋겠다. 마음의 독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아서 당장은 행동할 수 없더라도 언젠가 긍정적인 에너지가 차오르면 나아갈 수 있다. '기다리고 있다. 괜찮다, 회복을 위해 기도드리고 있다.'정도의 메시지만으로도 충분히 위로가 되고 많은 힘이 된다. 나아가는데 힘이 된다.



히키코모리의 변화는 대부분 작은 곳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곤두박질치는 것을 바닥에서 떠 받쳐주는 것은 사소하고 아무것도 아닐 것 같은 가족, 친구, 지인의 위로와 포용, 용서와 응원이다. 취약한 부분에 가로막혀 있는 것을 이겨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별거 아닌 것 같은 가족의 아주 사소한 도움, 작은 도움이다. 이들은 히키코모리에게는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다. 이들로 히키코모리는 변화해 간다.


오늘 하루 가까운 히키코모리에게 용서와 위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보는 건 어떨까? 응답이 없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인내하고 기다려줬으면 한다.


Q. 히키코모리 변화의 계기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A.  은둔기간이 짧으면 주거 환경의 변화, 감정의 변화, 직접적인 도움으로 계기를 만들 수 있다. 은둔을 시작한 가족이 있다면 분명 주거환경을 바꾸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것을 '회피'로 무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족 또는 부모라는 이름의 '죄책감'에 시달리기 때문인데 이건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자.
A. 은둔기간이 길어지면 주변 환경이 천지개벽할 정도로 바뀌거나, 죽음이 느껴지는 상황과 같이 거대한 갈림길에 들어서 인생을 진지하게 반추하면서 깨달음을 얻거나, 가족의 사랑에 크게 감화되는 계기 정도가 아니라면 변화를 쉽게 만들 수 없다.

내 변화의 계기는 두 가지다. 질병으로 인한 반추, 그리고 응답이 없는데도 수년간 꾸준히 메시지를 보내고 응원해 준 친구와 동료들. 응답하지 않은 수북이 쌓인 메시지와 카톡을 보면서 2023년이 지나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싶었고 만나 두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고 그것이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물론 가족의 지지가 받쳐줘서 가능했던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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