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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Feb 08. 2024

어느 날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동굴 속 이야기 여섯

어릴 적에 시골로 이사를 가면서 좋은 일도 많았다. 산에 가면 산딸기를 먹고, 칡을 캐 먹고, 뱀을 잡아서 땅꾼에게 팔고, 얕은 개울에서 물놀이를 하고, 물고기를 잡아서 쏘가리 매운탕 라면도 끓여 먹고, 둑에 방치되어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주인 없는 어린 호박을 한 개 따서 집에 들고 가면 호박 된장국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것은 책을 맘껏 읽을 수 있던 것이었다.


농번기에 시골은 바쁘다. 친구들도 모두가 집안일로 바빠졌고 난 그 무료한 시간을 학교에서 해가 빨갛게 지는 시간까지 책을 읽으며 보냈다. 작은 학교라서 책이 많지는 않았지만 상상력을 자극하는 책들은 차고도 넘쳤다. 초등학교 때 독서는 무료함을 달래는 수단이면서도 경탄의 세계를 펼쳐주는 장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내기, 장마, 추수, 방학에도 난 학교에서 책을 즐길 수 있었다.


성인이 된 후 독서는 직무 향상 수단이자 시야를 넓히는 도구였고 주파수가 비슷하면서도 색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사용했다. 책은 내 일상에서 늘 함께였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책이 점차 읽히지 않게 되었고 히키코모리가 된 뒤엔 책을 도무지 읽어낼 수 없게 되었다




책 한 권을 완독 할 수가 없었다. 완독은커녕 3페이지를 넘길 의지, 끈기, 관심유지가 되질 않았다. 읽어내려고 노력하면 책은 거부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하루에 1~2권은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독서 모임을 개최하는 당사자라서 책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모임의 책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수가 없었다. 난 게으름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해할 없는 게으름과 태만을 자책했다.


답답한 마음에 언젠가 인문학 강좌에서 스님께 물어봤던 적이 있다. '책을 잘 읽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책들을 읽을 수가 없어요.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도 읽어낼 수가 없게 되었어요. 무슨 일일까요?', 스님은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이 심해지던 시기를 증명하는 증상이었던 것 같다고 지레 짐작할 뿐이다.


히키코모리가 되고 나서는 컨디션이 좋아졌을 기술서를 몇 권인가 읽었지만 제대로 완독 했다고 생각되는 책은 '돌풍과 소강'이란 이름의 그림책 1권뿐이다.

<돌풍과 소강 - 장 자크 상페, 2015>


그런데 서울을 다녀오고(10년 차 히키코모리의 서울 나들이) 1월부터 11권을 완독 했다. 첫 책을 읽는데 2주가 걸렸고 이후엔 술술 읽혔다. 10년간 1권을 읽어내는 것조차 고통이었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우울증과 독서간 관계에 대해 검색해 봤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책을 읽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인지 기능, 집중력, 동기 부여에 영향을 미쳐 독서를 포함하여 한때 즐겼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우울증이 있는 사람이 독서를 어려워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집중 장애: 우울증은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독서에는 지속적인 주의가 필요하며, 우울증이 있는 사람은 책에 몰입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피로 및 에너지 저하: 우울증은 종종 피로감을 느끼고 에너지 수준을 저하시킵니다. 독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 수 있으므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독서에 필요한 에너지를 모으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관심 상실: 우울증은 한때 즐거웠던 활동에 대한 관심을 감소시킬 수 있습니다. 예전에 독서를 좋아했더라도 우울증으로 인해 책을 읽는 것을 포함한 취미와 활동에 대한 관심을 잃을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사고 패턴: 우울증은 부정적인 사고 패턴과 비관적인 전망을 동반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책의 내용에 참여하는 능력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기억 및 인지 효과: 우울증은 기억과 인지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개인은 텍스트의 정보를 유지하기 어려워 스토리라인을 따르거나 주요 세부 사항을 기억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모든 우울증 환자와 히키코모리들이 책 읽기에 곤란을 겪는 건 아니겠지만, 상당수는 책을 읽어내는 것을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울증 히키코모리는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다. 단순히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해 독서에 대한 변화 경험을 적어봤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은 히키코모리가 되기 전에 가능했던 것, 당연했던 것들을 기준으로 삼기 쉽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행동을 하는 히키코모리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쌓게 만든다. 화가 날 땐 잠시 숨을 고르고 아픈 사람이라는 생각을 갖고 느긋하게 포용해 주시길 바란다.




도서관에서 우울증에 대한 책들을 훑다가 답답함이 밀려왔다. '좋은 음식 먹고, 운동하고, 잘 자고, 사람들도 만나고, 많은 감각들이 활용되는 새로운 경험들을 하자'. 방문 밖으로도 나서지 않는 우울증 히키코모리들에게 가능한 얘기인지, 애초에 이 책이 우울증 히키코모리들에게 읽히기는 할지 의문이 들었다.


도서관과 서점에 가보면 수많은 우울증, 치유, 마음 챙김에 대한 책들을 만나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책들은 대부분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당사자를 독자로 하고 있다. 수많은 책들이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스스로 책을 읽고 도움을 받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게 가능한 건지 난 잘 모르겠다. 


많은 대상 독자가 읽을 수 없고 실천할 수도 없는 그 책들은 분명히 훌륭하고 도움이 되는 내용들로 가득하겠지만 나에겐 공허하게 느껴진다. 전문가 분들이 우울증 히키코모리의 가족을 독자로 하는 책을 써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난 우울증 히키코모리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선물하고 싶다면 그 좋은 책을 가족에게 선물하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위로가 되는 책을 선물하고 싶다면 얇은 그림책이면 좋을 것 같다. 


Q. 히키코모리의 부정적인 면에 대한 글은 언제까지?
A.  히키코모리가 느끼는 감정과 어려움들을 이해시켜 드리기 위한 글이라 어쩔 수가 없다. 아마도 외출에 대한 공포, 연락 회피, 가족과의 감정, 건강 등을 얘기해야 하는데 3~5개 정도의 글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그 이후엔 전환점과 극복에 대한 내용을 적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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