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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키코모리 K선생 Mar 10. 2024

미알못은 매일 인사동 미술관에 갑니다 (2/2)

마음의 해금(解禁)

<바닷가의 수도승>끌렸다. 검은 바닷가에서 바람을 맞으며 상념에 잠긴 채로 모래 위를 거니는 수도사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수평선 너머에서 짙은 구름은 폭풍을 예고하는 듯했다. 답답해졌다.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운명, 드넓은 세상에서 없어진다 해도 변하지 않을 풍경에 외롭고 쓸쓸했다.


바닷가는 사막처럼 느껴졌고 수평선 너머 피어오르는 구름은 모래폭풍으로 보였다. 수도사는 서서히 그림에서 사라졌다. 서늘한데 갈증이 나는 기분이었다. 카톡 프로필을 바꾸고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란 이름은 곧 잊었다.

<바닷가의 수도승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며칠 전에 <우리 각자의 미술관 - 최혜진, 2020>을 읽었다. 소제목 <지식 없이 즐기는 그림 감상 연습>이 미술 문외한인  딱 나를 위한 책이었다.  


감동이 미술감상의 목적일 때 '나'가 개입하는 미술감상을 한다. 난 그것을 죄악시했다. '나'를 차단하고 작품 뒤에 보이지 않는 정답을 찾고 있었다. 느끼는 것은 개인화에 대한 것이고 나에 대한 것일 텐데 감정을 궁금해하거나 세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잘못된 것 또는 나약한 것으로 취급했다. 


나에게 조차 관심이 없고 시선을 두지 않는데 타인의 작품을 내 감정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였다. 난 과거에 작품에서 느끼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마찬가지로 느끼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미알못이라면 한번 읽어보실래요?


감동이라는 단어 안에는 움직임과 떨림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감동할 때 우리는 무언가 나에게 충돌해 왔음을 느끼고 전율하지만, 그것의 정체를 정확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상태에 빠집니다. 그 일이 벌어진 장소가 분명 나의 내부인데도 흡사 처음 발을 딛는 낯선 곳에 도착한 듯 느끼죠. 감동하는 자아는 보호막을 잊고 스스로를 무언가에 찔리도록 개방합니다. 감동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흔들리며, 흔들리기 때문에 중심을 새로이 잡아야 할 내면의 필요와 마주합니다. 예전과 다른 내적 질서를 가진 사람이 될 가능성의 문이 열리는 것이죠. - 25 page
제가 만약 반 고흐 무덤에 다시 간다면 처음과 같은 감정을 또 느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감동하기'가 미술감상의 목적이라면 선입견 없는 백지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고요. 외부에서 주어진 해석이 없을 때는 자신의 반응에만 집중하게 되므로 오히려 스스로를 열어놓을 확률이 높다고요. - 26 page
앞서 '독자들이 그림을 마주하고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느낌, 인상, 연상, 기억을 소중히 여기게 돕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저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서 소중히 여긴다는 뜻은 '감상에 무슨 사유가 필요해요, 그냥 느끼세요'라는 식의 무조건적 긍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느낌, 인상, 연상, 기억의 출처와 의미를 곰곰 따져보고 언어를 통해 그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경험을 해보자는 권유입니다. 감성의 영역이라기보다 지성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이죠. 강남순 철학자는 <배움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크게 보자면 두 종류의 배움이 있기 때문이다. '나'가 부재한 정보의 축적으로서의 배움과 '나'가 개입된 성찰적 배움" 그림과 만나는 일 역시 그렇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나누고 싶은 내용은 그림을 볼 때 '나'를 개입시키며 보는 방법입니다. - 27page




<바닷가의 수도승>이 떠올랐다. 위키에서 작가에 대한 설명을 읽었다. 

그의 어머니 소피 도로테아 베힐리는 프리드리히가 7살이 되던 17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 년 후에 그의 누이 엘리자베트가 죽었고, 두 번째 누이인 마리아는 1791년 티푸스에 굴복을 했다.

분명 그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가장 커다란 비극은 그의 동생 요한 크리스토퍼의 죽음이었다. 13살이 되었던 프리드리히는 동생이 얼음이 언 호수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요한 크리스토퍼가 위험에 빠진 카스파르 다비트를 구하려고 하다가 죽었다고 암시하는 언급도 있다).


왜 끌렸는지 알았다. 그의 상처와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세상과 운명에 대한 쓸쓸함이 그림 어딘가에 들어있었고 그것이 나를 자극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군.

<바닷가의 두 남자>, 동생과 어깨를 마주하는 것을 생각했을까?
<안개위의 방랑자>, <오크우드의 수도원>, <꿈꾸는 자>




이 책을 읽고 딱히 달라진 건 없다. 미술감상에 관해서는 말이다. 책 한 권을 읽고 미술에 대한 지식이 넘쳐흐르고 식견이 높아지는 일 따위는 없다. 난 여전한 미알못이다.


하지만, 마음의 족쇄를 풀었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나약한 것이 아니다. 내가 느끼는 사소한 것도 얼버무리지 않고 소중히 필요가 있다. 민감하게 느끼고 자세히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고찰이고 내 세계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자신에 대한 포용의 크기와 깊이가 무언가를 받아들일 있는 크기를 결정하는 느낌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크게 다가온다.


그래서 미술관을 다녔던 시간,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미술관 책을 읽었던 것에 무슨 의미가 있었냐고? 아. 가능성의 즐거움이 생겼다(소통의 가능성, 자유의 가능성, 해금 영역의 확대 가능성). 미처 몰랐던 다른 곳의 족쇄도 풀어낼 수 있다면 일상에서 보이는 광경도 조금씩 달라지고 더 즐거워질 것 같다.



여전히도 미술 문외한인 난 앞으로도 인사동 미술관에 다닐 생각이다.

Seliq - Knocking' on Heaven's Door


-  조금씩 미술도 배우면서 알아가고,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 뒤엔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 언젠간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 소설에 그려진 '요시토모 나라'란 작가와 같은 그림으로 내 생각을 그려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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