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인정했고 수치심과 타인에 대한 공포도 웬만큼 극복해서 어려움 없이 회복으로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큰 오산이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머리를 들어 현실을 바라보자 외면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압도되고 말았다.
2층에서 아래를 보고 용기를 다진 뒤 위를 바라보았다
히키코모리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전의 생활로 복귀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있었다. 난 10년을 보냈다. 유통기한이 꽤 지난 상태다. 난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은...'이라고 부인했지만 마음 아래에선 불안과 절망이 흐르고 있었다. 조급함은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불편하고 불안에 쫓겨서 생겨난 감정이었다.
과거를 인정하고 수치심과 타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히키코모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두 가지 문제가 다가왔다. 나에겐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었기에 그것에 잠식되어 버렸고 그래서 얼마간 방구석 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
첫 번째, 현실의 문제가 다가왔다. 현실의 희망을 그려내질 못했다.
'꿀 같은 희망은 없는 걸까? 10년이란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할까? 10년이야. 복귀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다면 쌓아온 걸 버릴 거야? 정말 버릴 거야? 버릴 수 있어? 그동안의 시간과 비용, 노력, 많은 사람들과 실패로 쌓아온 모든 것들을 포기할 수 있어?'
포기와 리셋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혀왔다. 일은 나에게 비용, 시간, 노력, 직장, 연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단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지만 일은 나에게 사람을 구하는 수단이었다. 일터는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는 탐침 지점이었고 다양한 측정과 실험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일은 공부의 도구면서 또한 구도의 도구이기도 했다. 일하는 시간은 자기완성의 시간이었다.
순간을 다음 단계와 다음 차원으로 나아가는 궁리/탐구에 온전히 사용했다. 함께 했던 이들의 고생과 실패를 주춧돌로 쌓아 올리고, 그것을 의미 있게 사용하면서 지나간 인연들과 다 같이 진흙탕에서 고생한 나날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고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내 성장에 올인하자는 게 인생 계획의 큰 틀이었다. 뼈를 갈아 넣었는데 보기 좋게 휴지가 되어버렸다. 아니, 휴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여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착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현실에 몰두할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 내지 못했고 행동을 이끌어 갈 동기가 없어 정체되었다.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망설이기만 한다
마음속에선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J] 근데 말이야. 진짜 리셋할 수 있어? 결심할 수 있어? 설령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10년간의 공백을 무시하고 써줘서 운 좋게 복귀한다 해도 몇 년 지나면 어쩔 건데? 과거를 아까워하지 말고 지금 포기하고 다른 길로 전환하는 게 옳은 거 아냐? 그래서 어쩔 거야. 언제 결판을 낼 건데? [K] 다이어트 어느 정도 해서 건강회복하고 결판낼 거야
[J] 어느 세월에? 결론을 알면서 회피하는 거 아냐? [K] ...
[J] 지금 결판내는 게 어때? [K] 준비가 필요해
두 번째, 자아상의 붕괴가 일어났다.
'불운의 트럭에 치여버렸다. 내 잘못으로 인생을 망쳤다. 과거에 왜 이런 짓을 했을까? 돌이킬 수 없다'. 이런 후회와 자책을 1분 1초마다 10년간 반복해 왔다. 그것을 하루아침에 "자. 회복하자. 모든 게 긍정적인 국면이야. 저스트 두 잇! 현재는 선물! 해피~" 이렇게 외치면 순식간에 생각이 히키코모리가 되기 이전의 상태로 긍정적으로 바뀌고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갈까? 불가능하다. 이것을 쉽게 생각했던 게 가장 큰 오산이었다.
히키코모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난 이미 새로운 인간이었다. 히키코모리가 되기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인생관, 자아상, 과거에 대한 인식 모든 것에 변화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취향, 관계, 가치 순위, 스탠스를 비롯해 자신에 대한 평가 같은 것에도 변화가 생겼다.
문제는 히키코모리 이전, 히키코모리 기간, 히키코모리 이후 회복기, 향후 그리고 싶은 미래에 대한 인식들이 전부 뒤죽박죽 섞여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지향하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는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과거에 대한 인식도 나빴다가 좋았다가 종잡을 수가 없어졌다. 어느 때는 머리를 쥐어뜯었다가 또 다른 때는 올바른 행동으로 간주하는 상황도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바도 모호하고 기억과도 합치하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이르렀다.
인생관, 자아상, 과거에 대한 인식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과거사건이 나에게 의미 있는 미래와 인과관계에 놓여 있지 않으면, 가치관에 부합되지 않기에 자신을 괴롭히는 재료가 되어버린다. 자아상, 인생관을 확립하고 과거를 그에 부합되도록 반추하면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잊거나 바꾸거나 덮어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간과 공을 들여 찬찬히 다듬어내는 종류의 작업이란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다.
우울증, 히키코모리에서 낫는 것은 자아상의 해체와 재정립이라고 생각한다.
다이어트와 운동을 하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카페에서 멍하니 단련하던 일상이 무너지고 몇 달 뒤, 방구석에서 괴로워하다가 결론을 내릴 수 있었고 교착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곧 친구의 응원에 힘입어 본격적으로 회복을 시작할 수 있었다.
희망이 움직일 이유를 만든다
- 교착상태는 마음에 무거운 추를 매단 것처럼 큰 걱정거리가 돼서 오늘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교착상태를 벗어나려면 내가 하루라도 일찍 결론을 내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끌고 있다. 마음속으로 '희망을 원해!'라고 몇 번이나 되뇌기도 했다. 어이없는 것 안다. 나약하고 겁쟁이다. 글을 쓰는 것도 권유로 시작했지만 어쩌면 로또와 같은 희망을 원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신 나간 소리를 고백하는 건 히키코모리의 상태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솔직하자는 동기하나 때문이다.
혹, 우울증 히키코모리 아이가 학교를 못 나가고 있다면 아이에게 학교에 가는 것 이외에도 많은 길이 있다고 희망을 불어넣어 줬으면 좋겠다. 선택권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학교에 복귀할 확률도 훨씬 높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 자아상을 바로잡는 일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 보고 어떤 내가 되고 싶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바닥부터 다져나가는 작업을 글로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다. 정신과 선생님이 권유하셨던 글쓰기가 아마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하고 히키코모리 글을 쓰려던 것이 늦어졌네요. 예약 일정이 월말까지 꽉 차서 그냥 올립니다. 다음엔 회복 양상에 대해서 쓸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