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키코모리 K선생 Mar 20. 2024

회복의 여정 : 다시 태어나다(1/2)

동굴 속 이야기 열여섯

난 과거를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미련이 있었다. 미련은 교착상태를 낳았고 히키코모리 후유증은 자아상 붕괴로 이어졌다.

- 교착상태 : 과거를 포기하고 새로운 일과 가치관을 향해 나아갈지 여부를 결심하지 못해 교착상태에 놓였다. 현실에 몰두할 수 있는 동기를 잃었다

- 자아상 붕괴 : 인생관, 자아상, 과거에 대한 인식이 모두 무너져 내렸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였다.


이 둘은 회복을 방해했지만 삶을 직시하게 만들었고 인생 전환점의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짧은 기간 동안 성장했다. 운 좋게 바로 회복했더라면 삶을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하는 이 지점으로 다시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걸음 후퇴한 것에 감사했다.


앞으로 인생에 감당하지 못할 어려운 일들이 많이 닥치겠지만, 다시 히키코모리로 돌아오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격적으로 회복이 시작되었다. 회복은 느렸다. 지난 인생의 무게와 히키코모리 기간에 짓눌려 단번에 회복할 순 없었다.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아가도록 이끌어준 것은 친구의 메시지였다.

나아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친구는 내 상태가 최악이던 당시부터 아무런 대답이 없음에도 메시지를 몇 년 동안 계속 보내며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고 인내해 줬다. 미안함과 고마움은 곧 공포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몇 년 만에 응답 메시지를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친구는 세상과의 끈을 한 개 만들어줬다. 히키코모리가 된 이후 처음이었다.

유일한 끈이었다


처음엔 메시지를 회신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응답 메시지를 쓰다가 힘들어서 포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갔고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점차 익숙해졌다. 응답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한 뒤 6개월이 지났고 몇 년 만에 전화통화를 했다. 전화통화가 부담스럽고 힘들었다. 처음엔 대답을 하는 정도로도 벅찼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대화도 조금씩 가능하게 되었다.


친구는 우리들 인생이 몇 개월 사이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2023년이 지나기 전에 만났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주변에 아픈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가던 시기였다.


친구에게 첫 메시지를 받고 햇수로 4년이 흘렀다. 카톡과 전화로 연락하는 것이 힘들다는 말에 메시지로 연락하는 것을 이해해 줬다. 자주 연락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이해해 주었다. 친구 인생에 힘든 일이 있어도 일상을 담담하게 전하면서 답답하고도 지난한 시간을 인내해 줬다. 고마움이 내 등을 떠밀었다.


현실에 몰두할 있는 동기와 목표가 생겼다. 올해가 가기 전에 만나서 고맙다고 전하자. 술잔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건강을 회복하자. 회복시기와 맞물려 힘내게 만들었다.




하나의 목표가 생기자 매일이 충실해졌다. 손 놓았던 다이어트를 시작했고 산책을 시작했다. 카페에서 사람을 견뎌내고 릴랙스 하는 훈련도 다시 시작했다. 여전히 내 공간은 집 앞의 작은 트랙과 투썸플레이스 그리고 병원뿐이었다.

자그마한 트랙과 길 건너 투썸플레이스가 내 안전지대 전부였다




어느 날 쳇바퀴 같던 작은 트랙을 벗어나고 싶었다. 비 오는 날 새로운 길을 찾아 산책여행을 떠났다. 특별할 것 없는 비 오는 날의 시골 풍경을 마주쳤다.


난 감동받았다. 어렸을 적 비 오는 날 한가한 아스팔트를 걸어 집으로 되돌아오던 기억, 가족이 놀러 간 바닷가에서 습한 아침에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었던 순간, <The Palace of Versailles, Al Stewart> 음악을 들으며 훌쩍이던 순간이 떠올랐다.


일상 풍경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이 순간 이곳에 살아있다는 것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감각이 깨어났다. 보이고 느껴지고 들렸다. 다시 태어난 기분을 느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시골길이었다




감각이 깨어나고 감정이 회복되었다. 산책이 즐거워졌다. 산책시간이 조금씩 늘면서 음악을 찾아서 듣기 시작했다. 아이돌이 좋아졌다. 강신주 장자수업을 들으면서 산책을 했다. 웃음이 많아졌다. 일상을 사진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질병에 대한 걱정을 모두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병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안과, 치과, 피부과에 갔다. 산책하면서 정형외과를 가고 가정의학과에 갔다. 내분비 내과도 정기적으로 방문했다. 몸은 정상으로 회복되어 갔다.

정신과만은 가질 못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직도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잔해가 있어서 꺼려진 건지도...


회복은 계속 이어졌다.

<The Palace of Versailles , Al Stewart>


-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은 관심이 바깥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처음 가 본 곳이었고 비가 와서 모든 것이 선명하고 조용한 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가족은 안전한 발판이다. 가족과 원만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건 쉽지 않다.

- 불편한 바깥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은 히키코모리 혼자서도 가능하지만 어느 정도 외부도움을 받는 게 좋다. 자극과 계기 그리고 북돋아 주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너무 힘들다.

작가의 이전글 극복의 여정 : 교착상태, 자아상 붕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