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히키코모리 K선생
May 05. 2024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았다.
각자 집으로 향하는 날이다
특별히 수박을 서리하러 가거나 뱀을 잡으러 다니거나 다 같이 빗속에서 뒹굴며 축구하는 이벤트가 없다면 집에서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땐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야구 배트로 휘둘러 쳐내곤 했다. 물방울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는 걸 보는 건 비 오는 날에 언제까지고 반복할 수 있던 특별한 놀이였고 명상이었다.
지치면 미닫이 문을 열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빗소리를 들었다.
석면으로 된 슬레이트에선 둔탁한 소리가 나고 플라스틱으로 된 슬레이트에선 통통거리는 소리가 난다. 양철로 만들어진 지붕에선 높낮이가 다른 음이 땅땅거린다.
큰 느티나무에선 빗방울 소리 대신 '솨아~~' 바람치는 소리가 났고 흙과 자갈이 깔린 마당에선 똑딱이는 소리가 났다. 화단의 벽돌과 노란 장판으로 둘러쳐진 누렁이의 집에선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비 오는 날엔 담벼락에 끼인 녹색 이끼를 멀뚱히 보면서 온갖 소리를 감상하며 낮잠을 잤다. 저학년 초등학생의 특별하고도 고급스런 특권이었다.
보고 듣는게 전부인 시간
좋은 기억과 경험이 쌓여 비 오는 날이 좋다.
어렸을 적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비 오는 날엔 듣는 것을 즐긴다.
음악 소리 보다 빗소리가 크게 들린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의 작은 발코니에 앉아 소리를 듣는다. 사람이 지나다니면 마루는 삐걱이고 의자는 울렁댄다. 신경 쓰인다.
'응? 그렇다고 짜증 날 일은 아니잖아? 삐걱이는 곳이니까 삐걱이고 울렁이는 곳이니까 울렁이지!'
장소를 긍정하니까 조금은 편해진다. 마루가 삐걱이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아이가 빨대로 음료를 재미있게 빨아 마시는 소리를 특별한 순간으로 생각하자.
마룻바닥에서 듣는 수행인가. 음. 나 수행하러 온 건가?
이봐 순간이 수행이라구!
어느샌가 목적이 바뀌었다. 뭐 수행이라도 좋을 순간이다. 시원한 주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