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에 내가 속할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포기했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은 온라인뿐이었다.
나만이 제자리에 멈춰있다. 그렇게시간이 흐르는 것이 괴롭지만 아무것도 시도할 수 없었다. 부정당하는 것이 두려웠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나 견딜 수 없었다. 무력함에 절망했고 괴로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잊고자 순간의 쾌락에 몰두했다. 알바에 도전하기 전엔 매일이 이러했다.
어느 날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전날 밤 긴장, 책임감에 10분도 잠을 이루질 못했다. 두려움에 휩싸여 밤부터 아침까지 내내 몸을 벌벌 떨었다.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나를 받아주는 세상이 여기에 있었다. 럭키! 운이 좋았다. 기쁨이 밀려왔다. 그렇게 10년의 히키코모리 생활은 막을 내렸다.
사회에 발을 내딛고 6개월이 지났다. 글을 쓰지 않은 시간 동안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고뇌와 성장이 있었고 느꼈던 것들도 많았다. 하지만 글로 옮기질 않으니 그때 느꼈던 것들을 잊고 말았다.
기억을 더듬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느꼈던 것들을 적는다. 사회에 발 내딛기를 주저하는 중증 우울증 환자, 히키코모리분께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 아르바이트로 공장 일을 시작했다.
자기 신뢰감이 바닥이라 숫자조차 세지 못하고 잠깐의 움직임으로도 헉헉대는 난 민폐 거북이 알바였다. 1시간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딱 하루만 버텨내자는 생각으로 인내하며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어느새 공장은 내게 안락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안락한 공간에서 내 감정은 안도감이 반절, 불안감이 반절이었다. 날 받아주는 세상은 이곳 하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활동반경을 조금씩 넓혔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자기 신뢰감을 늘려가는 생활을 몇 개월간 이어갔지만 이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일머리가 없어서 한소리를 들을 때면 모든 것을 놓고 싶어졌다. 하지만 세상에서 날 받아주는 곳은 이곳뿐이었다. 벗어날 생각은 불가능했다. 여전히 불안한 상태였다. 외줄을 위태롭게 걸었다.
두 번째 아르바이트로 도보배달을 시작했다.
도보배달이란 새로운 도전에 이르기까지 매일매일이 망설임의 나날들이었다. 아마도 혼자였다면 망설임에서 그쳤을 것 같다. 두려움에 머뭇거리고 미적대던 나에게 '해봤어요?'라고 매일 물어주는 분이 계셨다. 그래서 떠밀리듯 배달을 시작하게 되었다.
매일 불특정한 누군가를 만나고 받아들여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충만해졌다. 타인에게 배달원이란 무명의 인간으로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마스크를 쓰고 배달가방을 메고 있는 동안은 타인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부정적인 경험들도 있었다. 때때로 음식점 사장님한과 고객에게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 착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낙심했다. 하지만, 배달원이란 무명의 인간에게 감정을 전가하면 그만이었기에 난 큰 상처를 받지 않을 수 있었다.
무명이지만 매일 받아들여지는 기쁨이 있었다. 그래서 거부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난 조금씩 단단해져 갔다.
세 번째 아르바이트로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몇 개월간 지속했던 첫 번째 아르바이트 일이 없어지면서 급속히 우울한 감정과 괴로움이 밀려왔다. 첫 번째 아르바이트는 내 마음의 지지대였고 동아줄이었다.하루 쉬는 것 만으로 과거로 퇴보하는 듯했고, 다시 중증 우울증 환자 히키코모리로 돌아가는 게 아닌지 불안해졌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얻기 위해 고단하다고 소문난 상하차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한계에 달하는 육체의 고통은 이루 뭐라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강한 노동을 이겨낸 나날들은 나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었다. '이런 나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견딜 수 있구나'.
온몸에 든 멍과 상처와 파스는 내게 포상이 되었다. 하나하나가 기쁨이 되었다.
네 번째 아르바이트로 냉동창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육체에 새겨진 피로와 고통으로 제시간에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하루하루가 힘에 겨웠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곳에서 고통은 생각하기 나름인 것을 배웠다. 그것은 히키코모리로 지내온 시간과 지금을 성장으로 여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매일 본의 아니게 정신수양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일하는 순간에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고 과거를 소환해서 되새겨보며 조금씩 조금씩 성장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다섯 번째 아르바이트로 이사(포장이사, 창고이사, 이삿짐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했다.
벌써 다섯 번째 아르바이트였지만 두려웠다. 근력이 없기 때문에 근성이나 인내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신이 없었고 민폐 끼칠 것 같았고 내가 나에게 실망하는 상황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꼭 나간다고 약속을 했기에 억지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약 10명의 인원 중에 한국인은 나 혼자뿐이었고 나머지는 몽골 아저씨, 몽골 청년, 몽골 젊은 여성분들이었다. 첫날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해 침울했다. 몽골 아저씨는 그런 나를 옆에서 서툰 한국어로 "이렇게! 빨리! 아니!" 소리치면서 손짓, 발짓, 웃음으로 북돋아 주셨고 틈틈이 요령을 알려주셨다. 힘이 아니라 요령으로 일을 하는 것이었다. 점차 일에 익숙해졌다.
푸근한 얼굴과 그렇지 못한 근력
익숙해지자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것들을 소유하고 있는지 관심이 갔다. 그런데 내 눈을 끈 것은 따로 있었다. 이삿짐의 양이었다.
같은 크기의 아파트고 식구수도 똑같은데 이삿짐이 2배 정도 차이가 났다. 도대체 왜? 책, 옷, 주방용품, 신발이 끝도 없었다. 왜 버리지 않고 쟁여두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우리 집에도 버려야 할 책, 옷, 주방용품들이 끝도 없이 쌓여있었다.
정서가 축적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나 자신인데.. 유한한 순간이 지나갔기에 되돌릴 수 없는 순간과 조금이라도 연관된 물건에 정서적 가치를 부여하는 내 욕심이 너무나 컸다.
지나간 순간은 재연할 수 없는 내 기억 속 고유한 가치고 시간과 물건에 한정되거나 구속되는 것이 아닐 텐데... 시간을 물건에 구속시켜 가치를 보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믿음,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그러모으는 저장강박증, 아둥바둥 대는 소유욕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런 마음이 내적 경험을 약화시킬지도?? 란 생각이 떠올랐다.
'욕심부리지 말고 버리는 것으로 내 마음속에 착실히 남기는 것이 어떨까.. 매일매일 조금씩 버리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