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이후에 도착하는 언어
말이 다시 가능해졌을 때, 이미 늦어 있었다는 걸 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는 침묵이 지나간 뒤였고, 몸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으며, 비로소 내가 겪었던 일을 언어로 옮길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생긴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내가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지, 무엇이 그렇게 나를 멈추게 했는지. 그러나 그 설명은 기대했던 방향으로 닿지 않았다.
상대는 나를 이해하려고 듣지 않았다. 이미 자기 안에서 만들어둔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침묵하던 동안, 표정과 거리감과 눈빛으로 의미를 해석해 왔고, 그 해석이 굳어 하나의 서사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말을 꺼냈을 때 돌아온 것은 “왜 이제 와서?”라는 질문이었다. 그 말은 시간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이미 다른 이야기 속에 살고 있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겪은 일을 처음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상대에게는 그것이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이미 상처 위에 각자의 방식으로 딱지가 앉아 있었고, 나의 설명은 그 딱지를 떼어내는 행동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해를 구하려는 말이 오히려 상처를 건드리는 손길로 오해받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말은 존재했지만, 관계에 도착하지 않았다. 언어는 늦게 도착했고, 그 늦음은 이미 만들어진 해석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말이 닿지 않는 이유는 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말이 잘못된 시간표로 도착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침묵의 시간 동안 관계는 가만히 멈춰 있지 않았다. 상대는 나를 기다리는 대신, 나의 침묵을 해석하며 나름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결론이 굳어질수록, 나의 말은 점점 더 낯설고 불편한 것이 되어갔다. 이미 끝났다고 생각한 이야기 위에, 내가 뒤늦게 다른 의미를 덧붙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닫힌 이후에 도착한 언어는 종종 이해가 아니라충돌을 만든다. 나는 회복된 뒤에야 말할 수 있었지만, 상대는 이미 회복되지 않은 감정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있었기 때문이다. 이 어긋난 시간 때문에, 같은 문장은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돌아보면 그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너무 늦었고, 너무 다른 시점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래서 말이 닿지 않는 상태란, 침묵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해석이 어긋난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같은 사건을 겪었지만,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언어는 길을 잃었다.
다음 글에서는,
말이 닿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 다음에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 기록은 불안과 침묵, 판단을 미루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