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림이 말을 앞지를 때
갈등이 생기면 나는 말을 멈춘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은 생각이 동시에 몰려오기 때문이다. 무엇을 느꼈는지보다 먼저 떠오르는 건 늘 상대의 얼굴이다. 그 사람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어디에서 멈췄고 무엇이 상처로 남았을지를 계속해서 되짚는다. 그래서 말이 늦어진다.
말을 고르느라, 말의 무게를 가늠하느라, 조금만 잘못 말해도 관계를 더 상하게 만들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한다. 나는 이 침묵이 상대를 덜 소중하게 여기는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충분히 공감하지 못한 말은 상대를 위하는 말이라기보다 내 마음을 가볍게 덜어내는 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쉽게 꺼내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동안에도, 나는 쉬고 있지 않았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작업에 가까웠다. 어떤 말이 나에게 편한 말인지보다, 어떤 말이 상대에게 오래 남지 않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말은 늘 느려졌고, 그 느린 속도가 나를 더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 방식에는 늘 책임이 따라온다. 빠르게 말하지 않는 대신, 오래 생각한 말에는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이 남는다. 나는 그 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 때만 입을 열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 말은, 상대를 향한 배려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은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끔은 이 태도가 나를 더 고립시키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상대는 이미 말을 끝냈는데, 나는 아직 말의 시작점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 시간 차이 앞에서 나는 늘 너무 느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느림을 버리면, 내가 지키고 싶었던 기준까지 함께 무너질 것 같았다. 말을 고르는 시간은 늘 조용했지만, 그 안에서는 계속해서 문장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이 문장은 너무 날카롭지 않은지, 저 문장은 책임을 피하고 있지는 않은지, 끝없이 검토하고 지우는 시간이 반복됐다. 끝까지 남은 말만이 비로소 입 밖으로 나올 자격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헤아림은 이미 끝났는데, 언어는 늘 그 뒤를 한참 늦게 따라왔다. 공감은 이미 시작됐지만, 그 감정을 말로 충분히 담아낼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나는 계속해서 멈춰 있었다.
말이 늦어지는 동안에도, 마음은 이미 여러 번 상대에게 다녀온 뒤였다. 며칠이 지나서야 말이 생긴다.
그제야 감정이 문장이 되고, 그 문장이 관계를 해치지 않을 것 같다는 감각이 든다. 완벽한 말은 아니어도,
적어도 후회하지 않을 말이라는 확신이 생긴다.
그때 나는 비로소 입을 연다. 빠르게 말하지 않는 건, 상대를 덜 소중하게 여겨서가 아니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 방식이 언제나 이해받지는 않는다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다.
다음 글에서는,
말이 가능해지는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려 한다.
이 기록은 불안과 침묵, 판단을 미루는
시간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