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대신해준 마츠코
나는 왜 폭력적인 장면에서 해방감을 느꼈을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라는 소설의 앞부분을 조금 읽어봤다. 소설 속 한 장면을 읽다가 손이 멈췄다. 자매 사이에서 나올 법하지 않은 말과 행동이 오갔고, 분명 불쾌해야 할 장면이었다. 그런데 나는 놀라면서도 묘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인물에 이입하고 있었다.
읽기를 멈춘 뒤 한참 동안 생각했다.
왜 하필 그 장면이었을까. 왜 나는 거기서 시원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을까.
어릴 때 나는 폭력을 당하는 쪽이었다. 말하면 더 혼났고, 화내면 버릇없는 아이가 되었고, 억울하다고 말할 방법은 없었다. 게다가 집안의 관심은 늘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둘째 동생은 아파서 심장 수술까지 받았고, 막내는 자연스럽게 보호받는 위치에 있었다. 엄마의 시선과 걱정, 에너지는 언제나 동생들에게 먼저 닿았다. 그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픈 아이가 더 신경 쓰이는 건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해와 감정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주로 뒤로 밀려나 있는 사람 같았다. 괜찮은 아이, 버틸 수 있는 아이, 문제 일으키지 않는 아이.
그래서 나는 익숙해졌다. 참는 것에. 넘어가는 것에. 아무 일 없다는 얼굴을 하는 것에.
감정은 있었지만 표현은 금지였다. 분노는 삼켜야 하는 감정이었고, 억울함은 혼자 처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설 속 인물은 참지 않았다. 그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고, 선을 넘었고, 관계를 망가뜨리면서까지 감정을 밖으로 쏟아냈다. 도덕적으로 옳다고는 말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내 안의 어떤 부분은 그 장면을 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저렇게라도 한 번은 터뜨리고 싶었겠지.'
나는 폭력에 공감한 것이 아니라 억눌려 있던 감정이 터지는 순간에 반응한 것이었다.
나는 가끔 비를 일부러 맞는다. 비가 갑자기 쏟아지던 날, 나는 우산을 펼치지 않았다. 머리도,옷도,신발도 다 젖도록 그냥 걸었다. 옷이 물을 머금으며 무거워졌고 차가운 빗줄기가 피부를 타고 흘렀다. 나는 그 감각이 편안하다.
사람들은 비를 피한다. 젖는 걸 막으려 하고, 망가지는 걸 막으려 한다. 그런데 나는 그날, 막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좋았다.
아무것도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나를 단정하게 유지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상태. 비는 나를 젖게 하지만 마음은 가볍게 한다.
해방감을 갈망한다는 것
나는 폭력을 원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오래 묶여 있었던 사람이다. 이해해야 했고 참아야 했고 괜찮은 척해야 했다.
그래서 내 안에는 늘 이런 욕구가 남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만해도 되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소설 속 장면에서 느낀 쾌감은 파괴의 쾌감이 아니라 억제가 풀리는 순간의 해방감에 가까웠다.
나는 가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무 역할도 없는 상태. 아무 기대도 없는 상태. 아무도 나를 평가하지 않는 상태.
사라지고 싶은 것이 아니라 짐이 없는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다.
그 소설을 읽으며 깨달았다. 나는 망가진 인물에 이입한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이 대신 표현해 준 감정에 반응했던 거라는 걸. 나는 폭력을 원했던 게 아니라 해방을 원했던 거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해방은 파괴가 아니라 이제는 감정을 참지 않아도 되는 삶에서 조금씩 시작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