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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22. 2019

그들 모두는 제 삶의 주인이고자 했다

친일과 역사에 대한 고민, 소설 『북성로의 밤』

소설 『세 여자』에서 그려진 허정숙, 박헌영과 같은 공산주의자, 여운형과 같은 이들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던 그 시대의 이상이 현재에도 의미를 가질 거란 어렴풋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그 시대의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 궁금해졌다.


그러다 같은 '한겨레출판'에서 출판된 『북성로의 밤』이란 소설에 닿았다. 세 여자와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라는 동일한 배경이지만, 소설의 주 무대는 조선에서 처음 시작하여 조선 전역을 넘어 중국 내부까지 진출한, 일본제국의 성장과 그 궤를 같이 했던 미나카이백화점이다.



대만과 한국, 닮은 듯 다른 꼴


책을 본격적으로 읽게 된 것은 대만여행 직후였다. 대만 타이난시을 여행하면서 미나카이백화점을 연상케 하는 하야시백화점을 알게 되었다. 하야시백화점은 1932년에 개장하였고 타이완 최초의 엘리베이터가 들어온 건물이다. 현재는 카페와 기념품을 파는 대표적인 타이난의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나카에 도미주로는 대구 미나카이 포목점을 시작으로 1907년 진주점, 1911년 경성점, 1919년 평양점, 1923년 도쿄점, 1928년 흥남점과 함흥점을 열었다. 1933년 미나카이 백화점 대구 본점과 경성점을 열었고, 그해에 평양점, 1940년 신의주점, 1941년 남경점을 열며 승승장구했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하기 직전까지 미나카이는 조선 전국과 만주, 중국에 18개 지점, 종업원 4천 명, 연매출 1억 엔을 자랑하는 백화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 『북성로의 밤』 중에서










대만 타이난시, 1932년 12월에 개점. 대만의 두 번째 백화점이자 대만 남부 최대의 백화점이었다. 일본의 패전 이후 문을 닫았다가, 2013년 타이난시가 복원작업을 시작하여 타이난의 문화창작백화점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하야시백화점 공식사이트 링크)






내가 방문했던 대구의 북성로와 목포의 구시가지에는 일제시대에 대한 어두운 과거를 기억해야 된다는 메시지나 그 당시 독립운동을 비중있게 배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백화점 내부에는 창립자 하야시의 소개가 있었지만, 백화점을 만든 대만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이라던가 타이난에서 의미있게 전개되었던 독립운동의 내용은 없었다.


적산가옥(敵産家屋, 적의 가옥, 일제강점기에 건축된 일본식 건물을 뜻함)을 카페로 식당으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하는 사례는 국내에도 없지 않다. 이러한 건물 재활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민간이 아닌 나라에서 복구한 건축물임에도 역사적 설명이 적은 것은 의아한 부분이었다. 더 놀라운 점은 대만은 아직도 일제강점기 사용한 총독부 건물을 현재는 총통(대만의 국가원수)의 집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보면 조선총독부 건물이 '청와대'로 쓰이는 셈)



1919년 타이완총독부로 쓰였던 건물을 현재는 총통의 관저로 사용하고 있다 (출처:ko.wikipedia.org/wiki/중화민국_총통부)


일제강점기를 바라보는 대만과 우리나라의 시각 차이는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있다. 대만은 외성인, 본성인, 원주민으로 인구 구성이 나뉜다. 또한 대만의 정치 역사는 자생적인 정치세력의 등장하기 전에 번번이 섬 외부의 세력의 폭력적인 점거로 이어졌다. 반면 조선은 500년 남짓의 기간 동안 한 왕조가 그대로 지속할 만큼 정치적인 안정과 동질성을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일제의 착취와 수탈이 대만 사람에게나 조선 사람에게나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하다. 다시 의아해진다. 일제강점기는 엄연한 식민수탈이고, 친일파는 공동체를 배반하여 잇속을 챙긴 사람들인데 어찌하여 대만 사람들은 거기엔 화를 내지 않은가? 허나 이 질문엔 애초에 문제가 있는데, 제강점기와 친일을 바라보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그것이다.



역사의 이분법을 넘어


소설 『북성로의 밤』의 흥미와 가치는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과 친일을 했던 태영을 '적'으로 한정하고 그리지 않는 데 있다. 일본에서 차별을 받아 새로운 기회를 찾아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이란 이유로 늘 차별을 받아야 했기에 일본인이 되고 싶었던 태영, 일본인과의 '사랑'을 계기로 그저 자신의 좋아하던 사람 곁에 있고 싶었던 정주를 그려낸다.


이 소설이 취하는 방식은 인물의 행동에 대한 판단이 아니다. 그저 '보여주기'다. 소설은 나도, 당신도 그 누구도 어쩌면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운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은 누군가에는 변명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보다 그들의 삶을 지켜본 이의 증언에 가깝다.


나는 노태영의 죽음과 나카에 도미주로의 몰락에서 사람살이의 아픔과 세월의 무심함을 봅니다. 세월은 그들의 삶에 아무런 애정도 갖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달리 어쩌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도리가 없으니까요. (중략) 그들은 누구를 위해 혹은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는 제 삶의 주인이고자 했으며, 다만 살기 위해 살았습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나는 소설을 읽고 난 뒤 "친일파를 청산하자"란 주장이 정의의 회복일까,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일까 사이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등장인물 태영, 나카에 사장, 정주와 아나코 모두는 소설 속에서 불행한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현실은? 친일파임에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이들이 많다. 동시에 자신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친일을 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는 이들도 많다.


나는 누가 적극적인 친일파였는지, 어쩔 수 없는 친일파인지에 대해 우리 사회가 충분히 해명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생각한다. 6.25 전쟁과 경제개발로 사회 지도부는 혼란보다는 빠른 봉합을 원했고, 친일파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기회를 번번이 놓쳤다.


역사적 판단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피해 보는 이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친일파일지 모른다. 친일의 문제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아서 누군가는 억울하게 친일파란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억울하다는 프레임을 이용했을 것이다. 이는 그들의 반성의 기회도 막는다. 충분히 반성하고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은 선조의 오명을 그대로 안고 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억할 과거가 있는 개인 또는 공동체는 필연적으로 역사 속에서 산다.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한 우리 모두는 역사란 선상에 있는 사람들이고, 또 역사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주체이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지 않았던가. 망각되지 못한 '친일파'는 현재하며 여전히 역사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문제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면 으레 인물들을 판단하고 분류해야 한다는 충동이 생긴다. 하지만 역사의 판단을 받아야 하는 인물, 그리고 판단을 내리는 인물 역시 단편적이지 않다. 이분법적 판단의 위험성은 이런 '단면'을 보고, 어느 쪽을 '정의'로 다른 쪽을 '부정의'로 굳히는 데 있다. 역사를 단순한 프레임이 아닌 사람과 맥락으로 읽는 태도는 역사판단자, 즉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다.




『북성로의 밤』, 조두진, 한겨레출판, 2012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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