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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27. 2019

예수의 복음과 마르크스의 꿈을 저버린 이곳

황석영, 『손님』, 창비, 2001.

나는 『손님』이 굉장히 오래전 작품인 줄 알았다. 분명 '황석영'이라는 원로의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님』은 무려  21세기인 2001년에 발간됐다. 2001년의 나는 '신간'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기 어려운 나이었다. 그러니 몰랐던 것도 당연하다고 변명을 해본다. 가볍게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나는 책을 읽을 때 문장을 곱씹어보는 것보다 조금은 빠른 템포로 흐름을 타듯 읽어나가는 편인데 이 책은 턱턱 걸렸다. 내용 때문이 아닌, 사투리 때문이었다. 황해도 신천이 배경이니 황해도 사투리임이 분명한 이 말씨는 마음속으로 혹은 입으로 소리내어보지 않으면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입말로 내어봐도 이해가 안 되는 단어들은 찾아보면서 읽었다. 덕분에 모든 문장을 꾹꾹 눌러서 읽어야만 했다. 북한 원전을 읽을 때면 속도가 나지 않아 답답했었는데 구어체는 더욱 느릴 수밖에 없었다. 분명 한글로 쓰인 책인데도 책 속의 대화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스스로를 보며, 마치 내가 이 책의 '손님'처럼 느껴졌다.


책을 읽기 전 두 개의 상징과 한 가지 사건을 이해해야 했다. '손님'과 '지노귀굿'. '손님'은 이 땅에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며, 지노귀굿은 죽은 사람의 넋을 저승으로 보내는 굿이겠지. 라는 얕은 이해와. 당시 '신천'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간단한 배경지식,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약간의 이해를 무기 삼아 내게 올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잔뜩 긴장한 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손님』은 삶과 죽임의 굴레에 휩싸인 이웃이자 적인 이들의 이야기다. 어느 날, 서로가 왜 적이 됐는지도 모른 채, 이웃이던 그들은 적이 되었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타인을 죽였고, 내 편의 원한을 갚기 위해 타인을 죽였다. '기회'가 없었고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이들의 칼부림이었다. 서로 때문에 생긴 게 아닌 억울함을 서로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억울하고, 억울하지만, 별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이들의 '투쟁'이었다. 그렇게 해서 서로가 죽어버리면 그 투쟁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공동의 적인 일제가 사라진 이후,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지고 있던 이들의 현실이 냉혹하게 드러났다. 다름을 조절하고 합의해 본 경험이 없는 그들의 삶에 또 다른 제국이 들어왔다. 그들은 그저 원래 하던 대로 다시 한번 적과 이웃을 구분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물었던 예수의 복음도, '노동계급이 해방된 평등한 사회'를 꿈꿨던 마르크스의 꿈도, 모두 소용없었다. 




첫 번째 손님,


20세기 초, 평양이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정도로 한반도의 서북지역은 기독교 세력이 힘을 얻고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서양의 손님인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됐을까. 윤정란의 『한국전쟁과 기독교』에는 서북 지역민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배경이 잘 정리되어 있다. 서북 지역민들은 서북지역을 '단군과 기자의 땅으로서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문명화의 전초기지'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 자부심과는 달리 이들은 조선시대에 정치적, 사회적으로 지속적인 차별을 받아 왔다. 중앙의 사족들은 서북지역의 지배층조차 자신들과 동급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서북 지역민들은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주요 관직으로 진출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비록 변방으로 취급받았으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지배, 피지배 관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또한 척박한 농토와 국경과 가까운 덕에 서북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에 관심을 두었다. 18세기 중엽에는 경제력이 전국 최고 수준이어서 중앙에서도 이 지역에 대해 관심을 보일 정도였지만 여전히 권력에서는 멀었다. 조선의 유교적 시스템 내에서 이들이 기댈 곳은 없었다.


이들에게 기독교는 이런 현실을 딛고 일어날 수 있는 사상이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반도를 여러 지역으로 나누어 교파별로 할당하고, 그 지역 내에서만 선교를 할 수 있었다. 교파 별 갈등을 최소화하고 효과적인 선교를 하는 방안이었겠으나, 조금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마치 식민지를 할당하듯 다른 이들의 삶의 터전에서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다. 중국을 통해 이미 기독교에 귀의한 서북 지역민들은 자체적으로 교회를 세울 기반을 마련한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단군의 유일신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을 연결시켜 지역민들이 자연스레 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였고, 평등의 가치를 설파하며 지역민들이 갖고 있는 조선왕조에 대한 반발감에 대한 분명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개입했을 때 구금된 기독교인들이 풀려나는 걸 보면서 지역민들은 기독교를(혹은 타국의 선교사를) 더욱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며 전쟁 시기 생명과 재산을 보호받을 수 있는 곳으로 교회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두 번의 전쟁 이후 북장로회의 교회와 신도의 수는 배로 증가했다.(현재도 장로회는 한국 내 여러 교파 중 가장 큰 규모이다. 북한에서 벌어진 사회주의와 기독교의 대립은 한국 기독교의 반공, 반북 감정의 배경이기도 하다.)



평양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 알려져 있는 장대현 교회, 널다리골교회가 전신이다. 사진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9594


조선의 유교적 시스템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평등의 개념을 이해한 이들은 일제가 패망하고 나면 자신들에게도 권력의 기회가 올 것이라 여겼다. 경제력이 있음에도 권력을 가져보지 못한 서북 지역민들에게 기독교는 자신의 욕망을 최고로 실현시킬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기회였다. 




두 번째 손님,


일제강점기에도 수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있었다. 사회주의 또한 한반도에서 발생한 이념은 아니다. 그러나 조선의 계급사회를 부정하던 이들에게 충분히 매력적인, 소련의 힘을 빌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는 적합한 이념이었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들과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이들의 욕망은 어떤 부분에서 닮아 있었다.


경성과 중국, 소련을 중심으로 활동한 다양한 파벌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제의 패전 이후 소련군과 함께 북한으로 들어온다. 기독교가 평등의 사상임에도, 자본주의의 논리를 입은 기독교는 돈이 없는 자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사회주의는 서북 지역에서 이러한 힘을 입지 못한 자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또한 토지개혁 등으로 경제력을 가진 지주와 상인 계급의 기독교인들의 경제력을 무마시키고자 하면서 본격적으로 기독교와 대립한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정당들과 사회주의 정당 간의 연합과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서북지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의 북장로교를 뒤에 두고 있었고 사회주의자들은 공산주의를 기반으로 한 소련을 뒤에 두고 있었다. 소련이 들어온 북측에서 기독교 세력은 힘의 우위에 서기 어려웠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의 연장선이었을 수 있는 이들의 대립은, 자신들이 놓인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고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한 개인들의 무력한 충돌이었다.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권이 들어서기 이전 많은 기독교인들이 월남했으나, 서북지역에 남은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신앙을 잃지 않고 권력의 기회를 갖고자 했다. <손님>의 주인공들은 곧 전쟁을 맞는다. 미군이 개입한 전쟁은 책의 배경인 황해도 신천 사람들에겐 해방의 복음과도 같았다. 누가 누굴 죽여도 모르고, 결국 승리한 자의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죽였다. 우리가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죽였고, 우리가 죽임을 당해서 죽였다. 삼팔선과 너무 멀지 않은 모든 지역은 전쟁 중 모두 이런 일을 겪었다. 아침이 왔을 때 남과 북 중 어디의 군인이 마을을 점령했는지에 따라 오늘은 내가 죽고 내일은 네가 죽을 수 있는 시기였다. 누구의 편도 아닌 자들조차 편을 정하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였다. 하물며 '편'에 선 자들은 이 죽음을 어떻게 피해 갈 수 있었을까.


황해도 신천서부교회. 사진 출처: https://www.bullsere.kr/board_view.html?code=8333&num=13273


북한 신천박물관. 북한은 신천학살사건을 미국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으로 평가한다.  사진출처: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



현재, 두 손님은


현재, 두 손님은 각각 남쪽에, 북쪽에 자리 잡았다. 화해도 못한 채 갈라섰다. 그리고 남이든 북이든 두 손님을 화해시키고, 손님들이 이 땅에의 사람들과 손을 잡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애썼던 사람들 또한 죽임 당했다. 내가 살기 위해, 내가 얻기 위해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 시기가 너무 원망스러웠다. 책을 읽으며 마음의 혼란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황석영은 진노귀굿의 아홉 번째 마당, '길 가르기'에서 나를 달랬다. '길 가르기'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고 망자가 이승에 머무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자자, 이젠 돼서. 그만들 가자우. 순남이 아저씨의 헛것이 말했고 일랑이도 그 옆을 따른다. 그래. 가자우. 다른 남녀 헛것들도 벽에서 스르르 일어나 바람에 너울대는 헝겊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득하게 먼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루 죽이고 죽언 것덜 세상 떠나문 다 모이게 돼 이서. 요한이 아우에게 말했다. 이제야 고향 땅에 와서 원 풀고 한 풀고 동무들도 만나고 낯설고 어두운 데 떠돌지 않게 되었다. 간다. 잘들 있으라"


비극이었다. 당시에 살아간 그들은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했고, 살리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미워했고, 죽이고 싶었고, 이기고 싶었다. 내가 놓인 위치와 현실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바탕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자세! 그 딴 건. 할 수조차 없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끊어낸 자도, 그렇게 죽임을 당한 자도 쉽게 생을 떠나 저승으로 가지도 못했다. 죽임을 당한 자 또한 누군가를 죽인 자였다. 떠돈다. 서로 죽이고 죽인 것들은 세상 떠나면 다 모이게 되어 있단다. 그런 원한의 굴레에 매인 자들은 한 데 만나서 가지 않으면 쉽사리 저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건 아닐까. 한평생 기독교에 매여 있던 그들조차, 예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죽인 자로 죽은 자를 만나고, 죽은 자로 죽인 자를 만나야만 이승을 떠나 구원받을 수 있는 건 아닐까. 이 땅에는 결국에 만나서 같이 떠나야 할 영혼들이, 황석영의 말처럼 냉전의 유령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 걸까.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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