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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r 30. 2019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보다 나은 역사회복을 위하여

소설 『북성로의 밤』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거주했던 일본인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소설이 다 담지 못한 다양한 일본인의 모습이 더 궁금해졌다. '일제시대', '일본인'을 검색해보니 가장 나의 관심사를 그대로 제목에 담은 책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을 알게 됐다.


책은 상상해왔던 지배자 '일본인'이 아닌, 전혀 다른 부류의 일본인도 언급한다. 일제강점기 35년의 세월 동안에는 식민지의 조선에 태어나 조선을 '고향'이라고 생각한 일본인(모리키 가즈에), 3.1 운동에 동감하여 조선인에 대한 진압을 그만두자 외치며 '조선 침략 반대춤'을 췄던 일본인(나가이 요시), 일본인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인을 사랑하는 생활에 일생을 바칠 것'이라 다짐하며, 오히려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친 일본인(조코 요네타로) 교사가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시대 일본인은 조선의 자원과 사람들을 착취하며 자신의 부와 성공을 추구하였지만, 조선인과의 '연대'를 꿈꾸었던 일본인도 있었던 것이다.


* 조선의 살았던 삶을 성찰했던 일본인으로 대표적인 인물 '모리사키 가즈에' 그의 사상과 삶을 엿볼 수 있는 관련 기사 (링크)  



뱀이 먹잇감을 삼키듯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된 후 부산과 원산이 개항되었다. 1883년에는 인천이 개항되었고 11월에는 한성이 개방되어 일본인들이 한성에도 거류할 수 있게 되었다. 1884년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김옥균 등이 공모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1876년부터 1884년 갑신정변에 이르는 10년 동안 조선 내 일본인은 76명에서 4,356명으로 증가한다.


일본은 이전에 미국과 영국 등과 불평등하게 조약을 맺은 관계에서의 오는 적자를 조선과 중국 땅에서 돌려받기를 원했다. 운요호사건 등을 통해 억지로 조선과의 조약 테이블을 만든 일본은 일본의 거류지에 치외법권을 인정하고, 수출입품에 대한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 불평등하며 매우 정략적인 조약을 맺는다.


일본인은 불평등조약을 시작으로 연이은 정치적인 세력 행사(갑신정변과 계속하여 체결되는 불평등조약, 을미사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를 하였고, 특히 주요 조선 개항장의 조차와 활용은 이후 조선의 식민화를 예견하듯 성장했다. 한일병탄은 1910년에 이뤄졌지만, 실은 그전부터 조선은 자주권을 잃고 일본에 서서히 잠식당하고 있었다.



조선은 일본인에게 '신대륙'이었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조선 이주'가 홍보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미 조선의 지리 정보가 일본인들 사이에서 꽤 알려져 있었단 것이다. 그들이 합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곳은 부산이나 원산, 인천 등 거류지였지만 몇몇 일본인들은 불법적으로 내지로 들어가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일본인은 조선을 유랑하며 모은 정보를 눈에서 입으로, 글로 확장하고 있었다.


한일병탄이 일어나기 전에도 일본인은 법적 거류지를 넘어 조선의 땅을 사기도 했는데, 그것은 전당포나 사채 등을 통해서였다. 돈을 갚는 날을 일부러 피하며 돈을 못 갚게 한 다음, 담보로 잡은 땅문서를 뺏기도 했다. 미국의 개척자들이 땅을 넓혀가듯, 조선은 그들에게 모험과 그에 따른 보상이 있는 곳이었던 셈이다. 새로운 시장을 찾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발 길은 점차 늘어났으며, 일본의 하층민들 역시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해 '어렴풋한 기대'를 품고 조선행을 선택했다.


1901년 일본공사 가토 마스오는 태양 1월호에 한국 이민론을 기고하여 "우리나라 인구는…… 1년 간 거의 40만 명 이상 증가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조선에 "인구가 희박한 곳에는 다른 이주민을 충분히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고 썼다.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86쪽
1909년 무일푼이 된 가족은 "난민이 되어 조선으로 건너갔다. 비참한 모습을 고향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다른 이유로는 … 신천지 조선에 가면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어렴풋한 기대에 넘쳐 있었다." -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116쪽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은 북한에 더 많이 살았다


1942년 말 일본 정부에 기록에 따르면, 조선 내 일본인들은 75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중 50만 명은 북한에, 25만 명가량은 남한 지역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경성이 있는 남한이 아닌 북한에 더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던 까닭은 북한지역에 '공업화' 때문이었다.


일본은 평양과 남포시 일대를 평남종합공업지구라 명하고, 일본 열도 내의 4대 공업지대와 더불어 5대 병참기지로 불릴 정도로 성장시켰다. 이밖에도 아시아에서 유래없는 수준의 공장과 발전소가 들어서는데 함경남도 흥남에는 종업원이 4만 5천명에 이르는 질소비료공장이, 압록강에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수풍발전소가 건설되었다. 이후 이런 산업시설은 북한의 주요 산업시설로 그대로 이어졌다.


1937년 공사를 시작하여 1944년 전기를 발전했던 수풍발전소. 당시 세계에서 3번째로 큰 수력발전소였다.


그 이후는?


1945년 일본이 패전하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황급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후 일본과의 수교와 전후 배상 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일본 정부는 한일기본조약에서 재한국의 일본인 재산에 대한 처분에 의한 대과 과실에 대해서는 '식민지 조선'을 운영했던 일본제국에 청구권이 있으며 그 재산을 이미 이양받고 소유한 '한국 정부'에 청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국은 전승국이 아니기에 일본은 보상을 할 이유가 없으며, 청구권 문제는 '국제법상 영토의 분리 내지 독립에서 비롯한 재정적, 민사적 채권 채무의 청산 성격'으로, 민사상의 채권채무의 문제로 다뤄야 한다고 했다.


1965년 박정희 정부는 이런 일본의 입장을 거의 수용하였지만, 일본이 제기한 양국의 재산과 권리 이익에 대한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한다. 대신에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무상원조와 차관을 지원받는 협정을 맺는다. 이 한일기본조약은 이후에 사실상 일본이 한국정부에게 보상을 청구한다는 억지주장을 펼치고 자신들이 원했던 수교를 성공했다는 평가, 한국정부가 한국경제가 미국의 원조를 받으며 매우 빈곤했던 상황에서 일본에게 큰 규모의 원조를 받는 실리를 취했다는 등의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2차에 걸친 김-오히라 회담시 원칙합의(62.10.20 및 11.12)
- 청구권 자금 규모 ∙무상공여:3억불 ∙정부차관:2억불 ∙민간차관:1억불 이상
- 제공 명분 ∙국교 정상화 축하금 ∙민생 안정 ∙아국(대한민국) 경제 발전에 기여
 - 1962.12.13 양국정부 승인
  (출처: 주일본대사관)


그 중 한일기본조약이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한 것에 대한 인정과 사과를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은 문제로 꾸준히 지적된다. 참고로 중국의 경우 일본과 1972년에 중일공동성명을 발표하고 수교를 맺었는데, 성명에서 일본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받았으나 보상은 받지 않았다. 이러한 조약 체결의 태도는 이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합의'라는 논란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 중일공동성명 전문 전문 링크




민주주의가 필요한 역사


이제는 결과가 아닌, 절차로서의 정의도 중요한 민주화 이후의 시대다. 시민들은 이제 정부과 개인이 결코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일본이든, 우리나라이든 예민한 사회적 갈등이 있는 사안에서 시민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다.


안타까운 사실은 시민의 의사를 대변해야 하는 우리나라 '국회'가 가장 신뢰도가 낮은 기관이란 것이다. 여전히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들의 의사가 정치인들의 정쟁의 도구로 쓰인다고 여겨질 뿐, 정치인들이 시민을 제대로 대변한다는 효용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의견의 폭넓은 수렴과 소수자를 고려하는 포용, 그리고 당사자의 참여와 다른 정치세력과의 대화와 절충. '민주주의'가 추구하는 방식과 그 방향은 역사를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방법을 통한다면 '연대'를 원하는 개인들의 희망과 행동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 다카사키 소지, 역사비평사, 2006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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