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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Apr 04. 2019

일본 입장에서 읽는 4번의 전쟁

책『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서울 서촌에 역사책방을 방문했다. 최근 역사, 특히 일제강점기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 그에 맞는 좋은 책도 추천을 받았다. 책 이름은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지만 나는 제목이 말하는 화자에 주목했다. 일본인이 이야기하는 그들의 전쟁은 어떤 모습일까. 대강의 목차와 책 소개 내용을 보니,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를 뻔하게 설명하거나 비판의식 없이 주장하는 문체도 아니었다. 더욱 다.

책은 저자가 일본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5번의 역사 강의를 정리하고 편집했다. 서술과 중간 중간의 질의응답은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게 했다. 많은 역사서의 경우, 전체의 윤곽 없이 구체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경우가 많아 나 같이 역사상식이 짧은 사람이 읽기에 쉽지 않다. 이 책은 대부분의 사건과 인물을 본문 안에서 설명하고 있었고 보충할 만한 책도 언급하고 있었다.




일본의 '제국주의 야욕'


우리는 일본의 한반도 '침략', 이어지는 만주와 중국 등으로 이어지는 확장을 '제국주의 야욕'이라 흔히 평한다. '야욕'의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니, "1. 자기 잇속만 채우려는 더러운 욕심. 2. 야수와 같은 야비한 성적 욕망."이라 나온다. 욕심 중에서도 가장 질이 나쁜 욕심이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한 나라로서 나올 수밖에 없는 평가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일본을 '악마화'하여 그 프레임에 가둬버리는 효과를 가져온다. 왜 그들은 그런 '욕심'을 부린 건지, 그 전쟁동기는 어떤 환경에서 나온 것인지 전후 맥락을 고찰하기 힘들게 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일본정부의 행동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교훈'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현재와 미래를 위한 '제안'을 찾아내야 하는 작업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본문 중

무려 1,0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제1차 세계대전이 있고 난 뒤에 똑같은 재앙인 제2차 세계대전을 일어났다. 왜 그런 역사적 비극이 반복되었을까? 왜 독일시민들은 전쟁을 외쳤던 나치당을 받아들이고 따랐을까? 유럽사회는 아직도 이 질문을 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만큼, 일본은 물론 우리사회는 그 시대의 일본에 행동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고 성찰하고 있을까. 책에 말미에도 언급되지만 일본인 스스로도 전쟁책임 문제가 충분히 논의되었는가에 대한 질문에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계속 확대되는 전선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불공정한 조약을 타파하고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정부관료의 절반 이상이 해외 문물과 제도를 공부하기 위하여 유학을 떠났고, 스스로 제도를 바꾸고 공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열강들의 식민지가 될 것임을 알았고, 그를 막기 위해 무리해서라도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보았다. 자신들의 부족한 부분은 조선과 그 외 식민지에서 보충하려 했다. '조선'은 그런 의미에서 일본 제국주의 기초였다.


특히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는 일본이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쟁을 통해 그전에 있었던 불공정조약을 시정하였고, 극동지역을 조정할 수 있는 역할을 인정받게 되었다. 일본은 그 기세를 이어가 더 큰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 상대는 '러시아'이거나 '미국'일 거라 예상했다. 더 큰 전쟁에 대한 공포와 조바심으로 일본은 만주와 중국지역으로 영역을 미리 확보해놔야 전쟁의 승산이 있을거라 판단했다.


CC BY-SA 3.0, 위키피디아


만주사변과 이어지는 중일전쟁은 '중국'이라는 시장을 유지하고 싶었던 영국과 미국, 러시아도 걸려있는 문제였다. 일본이 단독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에 다들 견제하였고, 이는 열강들이 중국 국민당정부를 지원하 되었다. 어느 순간 일본은 같은 편이었던 영국과 미국을 적으로 싸움을 하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이 독일과 손잡고 기세를 전환하는 기회가 됐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총력전을 벌이기에는 자원이나 군사면에서 월등하지 않았다. 독일이 러시아를 붙잡고 있는 동안 일본은 미국을 빠르게 선제공격하여야만 승산이 있을 것으로 봤다.


결론은 알다시피 실패로 끝났다. 그들이 점령했던 모든 식민지와 영토를 다 내주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전국민의 8.7%의 사람들이 철수를 경험했다고 한다(역으로 그만큼 일본인들이 해외에 거주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본인 전사자도 이백만명이 넘었다. 전쟁의 잔혹한 패배는 일본인들 스스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의식을 갖게 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놀라운 점은 일본인이 미국을 상대로 하는 전쟁에서 가졌던 그들의 감성이다. 전쟁이 시작되자, '12월 8일 선전조서가 내려진 날, 일본 국민의 결의는 하나로 불타올랐다. 상쾌한 기분이었다.'(다케우치 요시미),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고하세 사부로)라 증언한다. 일본 국민들은 이어지는 , 쟁의 승리와 국제연맹의 회원국을 자리하면서, 자신들이 열강과 싸우며 이권을 다툴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군부는 그러한 민중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들 스스로도 전쟁으로 인한 세력의 확대만이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현재와 미래의 일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원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 나라는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 (중략) 현대의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 경제전이 될 것이다. (중략) 전쟁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일본의 무력전에는 이겨도 지구전, 경제전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411쪽, 미즈노 히로노리의 주장 요약


그러나 일본 내각은 전쟁의 문제에서는 군부와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에 만주의 관동군은 만주의 확보와 이후 이어질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독단적으로도 움직여야 된다고 판단했다. 몇몇 언론인, 개인들이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군부의 행동을 내각과 국민들이 말릴 수 있는 제도적 견제장치가 그 당시에는 없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란 계기를 통해서 스스로 개혁하며 내각과 선거제도를 만들었다. 하지만 개혁을 강행했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주요 직책 인사권을 쥐고 있어, 핵심 관료로 남아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힘을 유지했다. 이 관료 엘리트들은 그들의 '전쟁 동기'를 관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패전 이후 군부의 힘은 사라졌지만, 군부의 영향은 그대로 내각으로 옮겨갔다. 아베 신조 총리는 56,57대 총리이자 만주국 경제개발에 참여했던 조슈번 출신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다. 그의 아버지도 기시 노부스케의 비서로 활동하다 외무상을 역임했다. 그리고 이들이 주로 속한 자민당은 무려 전후 55년 동안이나 일본의 집권당이다. 일본에는 공산당도 있고 사회민주주의당도 존재하지만, 자민당 보수정권이 줄 곧 우세적이다.




냉엄한 국제현실과 역사의 진보


흔히 국제관계를 표현할 때, 냉엄하다고 표현한다. '이상'과 '인권'보다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결정되고 강자의 입장이 관철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정하리만치 명확한 약육강식의 논리이며, 그것은 지정학적인 위치와 그 국가가 확보한 영토와 자원에도 깊게 연관되어 있다. 오늘 날 국제관계의 '냉엄함'은 어떤가? 공산진영의 붕괴와 세계화의 진전. 국경선들 위로 날아다니는 자본의 흐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세계가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하나의 프레임으로 이러한 사태를 읽은 일은 쉽지도, 가능하지도 않다.


평화롭지만 평화롭지 않은 현재. '냉엄함' 논리는 인권과 합의 이름 아래 여전히 유효할 것이다. 그럼에도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었다. 노련했던 역사학자의 말을 따라 인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희망을 가져도 될까.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가토 요코(역: 윤현명, 이승혁), 서해문집, 2018


글. 김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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