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준비하는 시간
청년청에 입주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자 전환작업을 시작했다. 출판사 신고, 사업자 등록증 발급, 사업자 명의 통장 개설. 귀찮은 서류 작업에 불과해 보여도 실은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일이었다. 힐데와 소피, 크나그 소령, 이렇게 세 사람만이 공유하던 생각(idea)에 불과하였던 '힐데와소피'에 실체(body)가 생겼기 때문이다. 법적인 무엇이 된다는 것.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한 인간이 태어난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김소피는 이전 직장에서 법인 사무와 회계를 담당했다. 회계 업무를 담당하기 전에 창업과 관련된 경험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창업 공모전과 학생 시절의 창업 경험은 일이 년도 못 채우고 끝나버렸다. 그건 일종의 창업 프로젝트였다. 기업의 사무나 회계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작년에 처음으로 창업 5년 차의 사무와 회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됐다. 분기마다 회계 데이터를 다뤄야 했다. 성과와 비용을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었다. 소피는 이때 비로소 회계에 흥미가 생겼다. 재무제표는 무엇이고, 손익계산서는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소피는 태고적 기원을 찾는 걸 좋아했다.
주식회사의 기원을 따지고 올라가다 보면 대항해시대가 열린 16세기 네덜란드에 이른다. 그 당시 한 척의 배를 만드는 것은 꽤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한 사람의 재력으론 부족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았다. 그것이 '주식'으로 발전했다. 주주들이 모은 '자본금'으로 배 한 척을 건조했고 그것은 회사의 '자산'이 됐다. 선장은 시장에서 외상으로 구매한 물건을 실었다. '부채'가 생겼다. 배는 세상을 한 바퀴 돌고 온 뒤, 선장은 선원들에게 임금을 지급하고, 주주에겐 이익을 나눠주었다. '수익'과 '비용', 그리고 '배당'이 나왔다. 운이 나쁘면 배가 가라앉기도 했다. 손해를 줄이기 위해 '보험'이 고안됐다.
대항해시대로 시작된 이 일련의 흐름은 상업의 폭발적인 성장을 가져왔다. 대항해시대는 단순히 전세계 지도를 넓히는 것이 아니라, 이 상업 시스템을 전파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세상은 점점 미래의 가능성에 기대어 돈을 움직이는 곳으로 변했다.
소피: 우리도 홈택스에서 세금계산서 발행할 수 있어요!
힐데: 어어^^
소피: 사무실 집기, 임대료 등 지출의 계정을 나누어서 관리해보려고요!
힐데: 으응~
소피: 분기별 회계장부,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봐도 좋겠어요!
힐데: (딴청)
창업은 '국가'의 존재를 가장 절실히 느끼는 방법이다. 회사의 모든 영업 활동은 국가의 장부에도 거의 똑같이 복사된다. 국가가 회사의 재정을 투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국가 주요 재원인 세금의 대부분이 기업에서 계산돼 걷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임금노동자는 자기가 번 소득만큼 국가에 '소득세'를 낸다. 그런데 노동자는 이 세금을 직접 내지 않는다. 그가 다니는 사업자가 임금 수준에 따라 '원천징수'하여 대리 납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회사를 퇴사하게 되면 갑자기 집 주소로 지방세니, 국세 청구서가 날아온다. 며칠 전 힐데가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힐데는 직장을 다니면서 매번 충실히 세금을 납부했지만, 직접 청구서를 받고 나서야 새삼스럽게 자신이 국가에 세금을 내는 사람임을 느꼈다. 모든 상품에 거의 다 매겨져 있는 '부가가치세'도 역시 기업이 대리 납부한다. 부가가치세를 포함하여 소비자에게 돈을 받고, 그 돈을 모아뒀다가 분기별로 국가에 납부하는 것이다. 국가와 기업은 '세금'이란 것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다. 이를테면 창업은 광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시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셈이었다.
팀 힐데와소피는 서류 작업과 함께 본격적으로 사무실 조성 사업도 시작했다. 공간이 생기면 줄자부터 꺼내 드는 힐데와 크나그 소령은 사무실의 치수를 재었다. 어떤 가구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필요한 집기나 사무용품은 무엇인지 세심하게 적어갔다. 소박하게 시작하는 살림이지만 힐데와 크나그 소령에게 이 공간이 주는 가능성은 결코 작지 않았다. 회계 언어의 맛을 안(?) 소피는 팀 업무노트에다 회계장부를 기록했다. 지금은 단순한 수준이지만, 언젠가는 꽤 많은 ‘0’이 박힌 대차대조표가 나올지 모를 일이라면서.
그러다 문득 소피가 힐데에게 물었다.
소피: 우리, '사업 놀이' 중일까요?
힐데: 놀이면 어때. 재밌자고 하는 건데.
놀이에 실패나 성공의 기준은 없다. '잘' 놀았느냐가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