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준비하는 시간
책의 주제를 정하고 나서부터 힐데와 소피는 주변인들에게 책을 낼 거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는 물론 '그게 돈이 되나'였고, 예상치 못했던 반응 중 하나는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으레 따라오는 질문은 '어떤 책(을 낼 거)이에요?'였다.
그런데 이 대답이 쉽지 않았다. 이 책을 간단히 설명하면 '남북통일'에 관한 것이지만, 통일을 하자는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통일"이란 단어를 들으면 통일을 전제한 책을 떠올릴 터였다. 그러니 그것으론 설명이 부족했다. 힐데는 사람들의 표정에 약간의 실망과 혼란이 서리기 이전에, 선수 치듯 이렇게 말하곤 했다.
"왜, 시중에 나온 통일 관련 책들은 뻔하잖아요. 북한을 알고, 통일을 하자, 뭐 이런 식요. 그런데 우리가 통일을 이야기하지만, 각자가 통일을 이야기하는 맥락과 구체적인 모습도 대단히 다르다고 봐요. 더구나 여지껏 우리사회는 어떤 방식의 통일을 할 건지, 혹은 말 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고요.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통일 방안은 나중에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일단 개인이 원하는 한반도 미래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생각했어요."
힐데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소피는 사람들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이들이 곧 첫 번째 독자가 되고 후원자가 될 것이었다. 소피는 힐데가 말하는 하나하나의 문장에 사람들이 얼마나 집중하는지, 또 얼마나 흥미롭게 생각하는지를 읽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간의 시도에서 소피가 가장 좋아하는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그 생각 참 기똥차다 손뼉 치며, 호기심을 가득 담은 눈빛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반응을 보일 사람은 힐데와 소피 자신들과 똑같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들이 만들려는 책의 내용을 한 번이라도 스치듯 생각해 봤던 사람, 그 필요성을 느낀 사람 말이다. 그러나 사람마다 각각의 기호와 관심이 있기 마련이다. 힐데와 소피 주변에 그들이 가지는 관심과 똑같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 사람은 끼리끼리 어울린다지만, 힐데와 소피가 만났으니 이미 그 운은 다 한 듯 했다.
힐데는 서울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직장을 위해 대구로 내려와 있었던 것이고, 언제든 다시 서울로 돌아갈 의향이 있었다. 힐데는 메트로폴리탄적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도시의 익명성과 속도, 그리고 다양한 선택지에서 만족을 느꼈다. 반면 소피는 광역도시에서 자랐지만 그가 가지는 인간관계나 행동에서는 늘 작은 마을 범위를 선호했다. 소피는 그가 영유하는 공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것에 만족을 느꼈다. 대구 정도의 도시는 꽤 나쁘지 않은 사이즈였다. 이런 소피가 한 가지 불만족하는 것이 있다면, 한번씩 품는 특정 관심사를 해소할 만한 콘텐츠가 지역엔 부족하단 거였다.
그러다 지난 2019년 4월 모일, 힐데와 소피는 서울시 청년청에서 입주 단체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힐데는 공고문을 꼼꼼히 읽고 보고는, 이번 기회에 청년청에 응모해보자고 했다. 청년청은 서울의 어느 다른 곳보다도 저렴한 가격으로 사무실을 임대해 주고 있었다. 만약 서울에서 출판사를 차리게 된다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그러나 소피는 아직 책 한 권도 나오지 않은 마당에 이렇게 올라가는 것이 과연 효율적일까 회의적이었다.
힐데_ 진짜 좋은 기회 같은데.
소피_ 그렇긴 한데. 서울에 올라가고, 사무실을 운영하는 게 사실 다 비용이잖아요. 책을 내고 이름이 좀 생기고 나서 해도 늦지 않을 거 같아요.
힐데_ 어차피 나중에는 다 해야 할 일들이잖아. 사무실도 내고, 책도 내는 거.
소피_ 그건 그렇죠. 그래도 당장 할 일은 아니지 않나..
힐데_ 될 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데. 뭐 이리 고민해. 되면 가는 것이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될 지도 안 될지도 모를 땐 지르기. 대책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모든 사업은 결국 이런 대책 없는 실행력에서 성장하기도 한다. 규모를 만들고 유지하기. 비용이 나갔으면 수익도 내기. 사이클에 올라탔다면 한동안 넘어지지 않게 패달을 밟는 것이다. 소피는 사업을 하고싶다고 말은 하면서, 정작 마음으로는 사업을 하기 싫었던 건 아닌지 반성했다.
소피_ 그래요. 지원해 봐요.
힐데_ 동의하는 거지? 그럼 알아보자!
청년청 입주를 위해 서울에 주소를 둔 사람이 필요했다. 힐데와 소피는 크나그 소령과 접선하게 됐다. 크나크 소령은 힐데가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학교 선배였다. 그런데 크나그 소령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힐데와 소피는 왜 진즉 소령과 결합을 생각하지 못했지라며 의아했다. 북한에 대한 관심, 정치에 대한 열망, 사업에 대한 호기심, 스마트 기기에 대한 사랑. 크나그 소령은 힐데와 소피의 관심사와 똑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이었다. 거기다 크나그 소령은 힐데와 소피의 생각에 맞장구까지 쳐주었다. 기존 통일관련 책들에 ‘그래 그런 책들은 재미없지, 누가 읽어'라고 힐난하며 새로운 방향성과 내용을 담지한 책이 나와야 함을 그들과 같이 역설했다. 우리는 곧 동지가 되었다.
청년청 입주 신청 몇 주 뒤 이어진 심사 자리도 고무적이었다. 심사위원들은 힐데와 소피, 그리고 크나그 소령을 이상하다거나 지루한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물론 설사 그랬을지라도 티 내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심사위원의 태도보다도 그들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들을 설명하는 세 명이었다. 이 모습, 이 행동 자체가 '일스럽다'는 것이 중요했다. 생각이 현실이 되어가는 첫 기쁨이었다. 심사를 마치니 세 사람은 잠깐의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묘하게, 세상에 조금 인정 받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