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말하는 것

#8 쓰는 시간

by 힐데와소피
때는 2018년,


책과는 전혀 상관없었다. 힐데와 소피는 광주로 갔다. 당시 광주비엔날레의 주제는 "상상된 경계들"이었다. 경계와 상상, 그들이 결코 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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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작품은 많았지만, 힐데와 소피 두 사람 모두 좋았다고 꼽은 작품이 하나 있었다. "평면이 새로운 깊이다(Flat is the New Deep)" 비엔날레에 설치된 두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의 제목이다. 커다란 스마트폰을 세운 듯한 화면에는 하나하나 도트로 그려진 픽셀아트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 앞에는 마우스가 하나 놓였는데, 관람하는 이가 마우스의 휠을 내리면 그림은 아래로 이어졌다. 스크롤(Scroll)은 깊이와 시간의 흐름, 그리고 공간의 이동을 만들어 냈다.


두 번째 연작 제목인 "평면은 정치적이다(Flat is Political)". 연작은 박근혜 퇴진을 외쳤던 촛불시위와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한국의 미투 운동이 다뤘다. 대중은 SNS와 스마트기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의사를 드러난다. 작가는 인터넷 상에 정치적 의사표현을 수집하고, 2017년 한국사회를 뒤흔든 사건을 긴 폭의 이미지로 재구성해냈다. 정치와 미디어, 현대미술의 현재를 영리하게 담아낸 오브제. 그리고 직관적인 작품의 메시지. 이렇게 아구가 딱딱 맞는 작품을 만나면 소피는 그 자리에서 '꺅'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어졌다.


2018_09_08_biennale_199934_re3000-1080x1620.jpg Pixels and Politics in the Age of Fake News, (출처: Hyperallergic.com /Adela Kim)



그리고 2019년 여름,


힐데와 소피는 책의 내용 못지않게 겉모습도 중요하다 생각했다. 책의 표지만 보고 내용을 판단하지 말라는 오래된 경구도 있지만, 요즘 시대에는 책의 내용만큼이나 표지와 생김새도 중요하다. 이러한 경향을 누군가는 '책의 공예화'라 표현했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던 책의 시대는 저물고, 책이 다시 소수의 독자들에 의해 수집되는 시대로 돌아간 것이다. 소수의 수집가들은 그들이 가진 책을 비교대상 삼아 책의 수준을 따진다. 이제 책은 수집가의 책장을 특별하게 보이는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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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는 책의 표지가 하나의 아트워크(Artwork)로 보이길 바랐다. 대학시절부터 오랜 기간 동안 독립서점을 들락거리며, 그는 예술에 관련된 서적이 아닐지라도, 이를테면 칸트의 책에서도 유려한 빛이 발산되기를 바라 왔다. 이미 어려운 책의 내용을 중화시킬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책의 모양이 아니었던가? 그 힘은 예술서적에서 충분히 증명된 것이나, 칸트 책을 사려는 사람은 화려한 책을 원하지 않아서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일 테다.


그러나 시대는 변한다, 소피는 생각했다. 이제 출판도 거대 출판사가 아닌 1인의 편집자 홀로 가능한 세계가 되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모두는 예술가가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애덤 스미스가 찬탄해마지 않았던 '분업'이 인간을 노동에서 소외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라 했다. 그러나 조만간 인간은 다시 자신의 노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 분업이 필요한 자질구레한 일들은 기계가 대신해 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될 수 있다...


힐데: 무슨 생각해?

소피: 아. 표지에 대한 생각요.

힐데: 저번에 광주비엔날레어서 봤던 작품 기억하지? 그 작가한테 우리 책 표지를 부탁해보는 거 어떨까?

소피: 우왓. 저도 그 작가 기억나요.


힐데는 책 표지에 통일과 남북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슈가 압축적으로 드러나기를 원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북한과 남북관계에 대한 뉴스는 끊이질 않는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은 그런 뉴스에 익숙해지고 무뎌졌다. 작가가 표현했던 2017년의 대한민국처럼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낯설지만 기발한 무엇이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두 사람 모두 기대에 부풀었다.


힐데: 작가한테 이렇게 메일 보낼까 하는데 어때?

소피: 이야. 이렇게 상세하게 메일을 쓸 생각을 어떻게 했어요?

힐데: 해야 하는 이야기는 일단 다 적어 본거야.

소피: 그래도 정성스러워 보여.

힐데: 그럼 보낸다?

소피: 좋아요!



이 땐 우리가 가을에는 책을 낼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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