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정해야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 제목은 정하지 않았지만 일단 쓰는 사람이 있다. 소피는 전자의 사람이고 힐데는 후자의 사람이었다. 소피에게 제목이 글의 범위를 정하는 '선'이라면, 힐데에게 제목은 글이 이끄는 '종착지'였다.
지난 3월 책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를 부를 표현이 필요했다. 소피가 정한 가제목은 <통일 시나리오 워크북>이었다. 작업 소재는 '통일'이며, 작업의 방식은 '시나리오+워크북'임을 짬뽕한 것이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처음에 키워드 수준에 머물렀던 것에 이름이 생기고 단락 단락 몸통이 생겼다. 이를테면 애초에 '통일방안결정알고리즘'이라 불렀던 것은 ‘프레임 맵핑’으로 이름 붙였다. '통일 방안'도 ‘미래 남북관계 형태’로 수정했다. “모두가 소망하는 가치는 통일인가?”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응답하는 개인이 있다. ‘통일 방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변하지 못하는 표현이었다. 통일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택지, 그리고 통일의 찬성과 반대에도 그 구체성을 더하기 위하여 총 6가지로 나누었다.
3개월 정도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새롭게 추가되고 확장된 내용은 소피가 처음 설정한 '선'을 넘었다. '통일 시나리오 워크북'이란 가제목도 보다 정확해질 필요가 있었다. 책 제목에 '통일'을 넣어야 하는가는 힐데와 소피의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통일을 대체할 단어를 오랫동안 고심해 보았지만 책의 중심 소재와 문제의식인 ‘통일’을 뺀다면 소금 없이 한 요리처럼 너무 밍밍할 것이었다. 결국 통일을 제목에 넣되, 그것을 색다른 맥락에 넣어 보자했다.
표지 작가의 섭외는 힐데와 소피가 더 빨리 제목을 결정해야 하는 이유가 됐다. 그간 각자의 마음에 은연중에 있었던 아이디어를 모아보니"우리의소원은통일?", "나는통일을 OO합니다", "프로듀스한반도" 이렇게 총 3가지 안으로 추려졌다.
소피: 프로듀스 한반도. 이거 잘하면 정말 힙한 제목일 거 같아요. 요즘 왜 프로듀스 시리즈가 인기를 끈 이유가, 내가 좋아하고 결정한 사람이 아이돌이 된다는 거잖아요. 사람들의 열망과 그 투표라는 방식. 우리가 생각하는 콘텐츠의 색깔하고 비슷하고.
힐데: 그래, 그런데 요즘 조작 사건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잖아.
소피: 투표는 결국 안 된다는 그런 느낌이 되는 건가. 아무튼 트렌디한 제목이지 않아요?
힐데: 트렌드하긴 한데. 그래서 장기적으로 봤을 땐 오히려 더 별로일 것 같아. 트렌드가 지나가면.
소피: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은 장강명 책 '우리의 소원은 전쟁'이 생각나요. 장강명 작가의 책이 더 신선한 것 같아요.
힐데: 아씨... 결국 제목이 구린 건 통일 때문이야...
3가지 안은 힐데와 소피의 머릿속에서 직관적으로 떠오른 것이었지만 그간의 작업의 방향과 내용을 부분적으로 담고 있는 것들이었다. 이와 같은 제목을 생각해낸 것만으로 둘이 가진 문제의식의 정확도가 높아진 셈이었다. 힐데와 소피가 3가지 안을 두고 논의한 내용을 정리한다면 아래와 같았다.
1안) 우리의 소원은 통일? 12점
적합성 ★★★
참신성 ★★
단어의 생김새 ★★★
호소력 ★★★★
총평: 통일을 통일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결론으로 바라보지 않겠다는 내용은 강조되나 참신함이 떨어짐.
2안) 프로듀스 한반도 13점
적합성 ★★
참신성 ★★★★
단어의 생김새 ★★★★
호소력 ★★★
총평: 프로듀스101 프로그램의 형식을 떠올리며 한반도 문제를 개인이 자신의 선호에 따라 결정하고 투표한다는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음. 그러나 '한반도'란 단어가 구체적으로 통일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전달이 불가능함.
3안) 나는 통일을 OO합니다 14점
적합성 ★★★★
참신성 ★★★
단어의 생김새 ★★★
호소력 ★★★
총평: 제목을 읽으며 독자 스스로 나는 통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음. OO이란 빈칸 안에 '찬성', '반대', '거부', '환영' 등으로 해석 가능함. 그러나 동시에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명확히 전달하진 못함.
20점짜리 제목은 없었다. 몇 가진 기준으로 따져봤을 때 전반적으로 나은 선택지는 3안, ‘나는 통일을 OO합니다’였다. 많은 결정이 사실은 시간의 제약을 받는다. 아니, 시간의 제약이 없다면 인간은 영영 선택이란 걸 미룰 것이다. 100퍼센트 마음에 드는 제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50퍼센트 이하의 불만족스러운 제목도 아니었다. 앞으로 결정하는 많은 일들이 이제 그럴 것이다. 주체적으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만족도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됐든 힐데와 소피의 첫 책 제목은 '나는 통일을 OO합니다'가 되었다. 이제 <나는 통일을 OO합니다>란 이름 아래 책의 영역을 확실히 구축하는 일, 그리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목적을 끝까지 탐구하는 일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