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데와 소피 중 어느 한 쪽도 '작가'를 꿈꿔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감히 책을 쓰겠다고 말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 '같이' 할 거라는 의지와 위안 덕분이었다. 한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이 채워주리라는 기대 말이다. 특히 그들의 책 <나는 통일을 땡땡합니다>는 통일 문제에 관련한 다양한 입장을 종합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에 걸맞는 균형이 필요했다.
이를테면 이 책의 첫 장인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요?"라는 질문을 살펴보자. 힐데와 소피가 처음 생각했던 이 챕터의 설명은 "북한 인권 문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이 문제의식은 '북한 인권 문제'는 확실히 존재하며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독자에게 북한 인권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 정권의 붕괴나 국제사회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풍기게 한다. 문제는 정작 북한 인권 문제의 해결 주체로서 '북한 정권'의 입장은 이 관점에서는 잘 드러나지않게 된다는 것이다.
힐데: 애초에.. 북한 인권 문제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피: 어멋. 무시무시한 질문이네요.
북한 인권 문제가 존재하는가는 물음은 사실판단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치판단의 영역에도 놓여있다. 누군가에게 이 질문은 당연히 문제 '있기에', 전혀 물을 가치가 없는 질문이지만, 누군가에게 이 질문은 당연히 문제가 '없기에' 전혀 물을 가치가 없는 질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힐데와 소피가 아예 북한 인권 문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는 식으로 판단 중지를 선언한다면, 이 역시 균형감을 잃어버린 서술이 되어버린다. 이 딜레마를 벗어나기 위해 힐데는 북한 인권 문제를 '계보학적'으로 정리해보기로 했다.
북한 인권 문제는 언제부터 인식된 것일까?
북한 인권 문제를 다루는 새로운 관점은 위 질문에서 출발한다. 힐데는 독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아래와 같은 흐름에서 배경지식을 전달하기로 했다. "세계대전 이후 인권에 대한 국제적 감시가 늘어났다" - "인권에 대해서는 정치, 시민적 권리와 사회, 경제적 권리로 나누어졌다." - "북한은 국제사회로부터 주로 정치적 권리에 대한 인권 탄압을 지적 받아 왔으나, 고난의 행군 이후 경제 문화적 권리마저도 위태롭게 되었다." - "2000년 '테러와의 전쟁' 선언 이후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크게 늘어났다." - "북한은 '우리식 인권'을 말하며 자국 내 인권 문제는 자국의 영역이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유엔국제인권협약에 가입하였으며, 사회경제적 권리에 대한 증진을 위해 자체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새로운 논의의 흐름은 국제사회가 언제부터 각국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단순히 '북한'에게 비추었던 문장의 조명을 없앴다. 2000년 이후에는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다음 국제사회에 대한 북한인권의 관심이 늘어난 맥락도 짚었다. 이러한 맥락으로 북한 인권 문제는 단순히 인권 문제가 아니라 국제 정치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그리고 이렇기 시각을 설정해야 하는 이유는 이 책의 독자가 북한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는 것보다는,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 나라와의 통일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힐데와 소피는 독자들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선택을 내리지는지 명확히 드러내고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 명확함을 위해서 힐데와 소피, 두 사람이 먼저 수시로 대화했다. 그들도 서로 상대방이 어떤 이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전제가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저 작가 한 명의 고독한 작업이라고 여겨지던 글쓰기는, 막상 힐데와 소피가 두 사람 공동으로 해야하는 작업이 되자 대단히 수다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두 사람은 매 챕터마다 각자 스스로가 전제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해야 하고, 의사소통해야 하고, 하나로 종합하여 결정해야 했다. 힐데와 소피는 이제 앞으로 모든 과정에서 '전제의 정의'와 '문제의식 방향성' 따위를 같이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자 눈앞이 아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