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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힐데와소피 May 12. 2020

나는 광고에 지쳤다.

광고는 당신의 주의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불편하지만 사파리를 사용하는 이유는 보기 싫은 광고를 제거해주는 읽기모드 기능 때문이다.



애플 기기를 사용하지만 웹브라우저로 사파리를 그렇게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사파리 자체의 문제인지, 웹사이트의 문제인지, 구글이 지배하는 세상의 문제인지 알 길이 없지만, 사파리에서는 뭔가 잘 안 되는 게 많다. 사파리에서 안 되면 크롬 브라우저를 열어야 하니 애초부터 크롬을 사용하는 게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편함을 감수하며 사파리를 메인 웹브라우저로 사용한다. 가장 큰 이유는 광고를 제거해주는 읽기모드 기능 때문이다.


브라우저 주소창에 있는 읽기모드 버튼 하나만 누르면 광고를 비롯한 쓸데없는 것들을 가려주고 읽기 좋게 텍스트와 필요한 이미지만 남겨준다. 광고로 번잡스럽던 페이지가 아주 깔끔하게 정리되고, 글씨체나 배경색도 바꿀 수 있다. 크롬에도 읽기모드와 비슷한 기능을 추가로 설치할 수 있지만, 필요한 이미지와 텍스트를 잘 선별해내지 못한다. 사파리 읽기모드 덕분에 나는 보기 싫은 광고를 없앨 수 있다. 어떤 웹페이지든지 접속하면 상하좌우, 사방 모서리, 배너, 팝업으로 뜨는 광고가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다.



(좌) 읽기모드 전 (중) 읽기모드 적용 (우) 읽기모드 변환 가능



웹페이지뿐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핸드폰을 확인할 때, 문자나 카톡 알람을 확인할 때, 무의식 중에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를 받을 때, 받은메일함을 열었을 때, SNS를 볼 때, 텔레비전을 켜고 라디오를 들을 때, 내가 원하는 콘텐츠를 볼 때, 집 밖으로 나서서 거리를 걸을 때 등 정말 요즘은 모든 순간에 광고에 휩싸인다. 심지어 링크를 공유하거나 특정 제품을 사용한 걸 리뷰하는 순간, 나라는 사람 자체가 광고판이 되기도 한다. 이전에는 텔레비전, 라디오를 켜지 않는 한 이런 광고를 마주할 길이 없었는데 인터넷과 SNS 세상이 되고 나서는 거의 모든 순간에 광고가 내 손가락 아래에 깔려 있다. 반갑지 않다. 광고 여러분.



그리고 귀찮기만 하던 광고가 어느 순간부터 짜증나기 시작했다.
그냥 무시하면 되는데 나는 대체 왜 이게 이렇게까지 싫은 걸까?




광고를 중심으로 돈이 도는 세상,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웹페이지마다 왜 이렇게 정신없이 광고가 떠다니는지 우리는 모두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구체적인 시스템까지는 이해할 수 없지만 '돈 때문'이다. 광고에 노출되는 접속자가 많을수록 운영자는 돈을 많이 번다. 이제는 다들 이런 시스템에 익숙해져 가지만 나는 영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유튜브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컨텐츠를 이용하기 위해 돈을 내지 않지만 크리에이터는 돈을 번다. 돈은 광고주가 대신 내주니까. 나는 그저 1분 미만의 광고만 보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양질의 컨텐츠의 접근할 수 있는 시대라고 여기며 이를 반가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ㅇㅇㅇ님, 광고 스킵 안 하고 다 시청했어요! 잘했죠?' 와 같은 댓글도 볼 수 있다. 구독자는 무료로 영상을 볼 수 있고, 광고주는 광고를 할 수 있고, 유튜브는 플랫폼을 제공해서 돈을 벌고, 크리에이터는 수익을 가져가는. 모두에게 윈-윈 구조? 정말 그럴까?


모두가 돈을 버는 건 아니다. 수익이 날 만큼의 구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크리에이터가 훨씬 많다. '그거야 그 사람이 잘 못하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암. 그럼요. 그런데 문제는 크리에이터가 돈을 벌기 위한 영상을 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양질의 컨텐츠를 만들 수도 있지만, 자극적이거나 편향적인 컨텐츠를 제작할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애초에 광고비를 받고 영상을 제작할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문제는, 크리에이터-구독자가 서로 보여주기-보기의 행위를 통해 끊임없이 밀당을 하는 동안, 돈이 오가는 경제는 별도로 굴러간다는 점이다.


만일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제작된 영상이 어떠한 문제를 일으킨다면? 상인이 잘못된 물건을 팔았으면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만, 잘못된 영상이 유통되는 데 대해 유튜브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튜브와 거래한 사람은 구독자가 아니라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구독자는 금전적 피해를 겪지 않는다. 또한 물건의 경우 피해가 물리적으로 명확하지만 무한 공유의 시대에 잘못된 컨텐츠로 인한 피해의 범위는 가늠조차  된다. 이전처럼 컨텐츠를 돈을 주고 사는 시대라면 책임을 컨텐츠를 제작한 사람에게 물면 된다. 하지만 크리에이터는 사실상 누구에게도 영상을  적이 없고, 구독자는 누구에게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다.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비단 사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일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공짜 영상을 봤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내 정보와 주의력을 대가로 지불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사실 공짜는 없다.




소름끼치니까 내 검색어 좀 그만 훔쳐봐


광고는 내 시야를 가리고 자꾸 내 주의를 끌려고 안달이다. 심지어 요즘은 말을 건다. "이거 필요하셨죠? 이게 요즘 진짜 잘 나가요!"라는 메시지를 막 던지는데 와 진짜 미치겠다. 아니 내가 오늘 오전에 '레오폴드 f750r' 찾아본  어떻게 알았지? 너네 자꾸  정보  갖다 쓸래??라고 누구 멱살 잡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누구의 멱살을 잡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떠돈다.


동네 마트에서 10대 딸에게 우편 광고를 보냈다. 광고는 임신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걸 본 아빠는 화가 나서 마트를 찾아가 "뭐요!!! 아니 지금 내 딸 보고 임신한 사람이라는 겁니까!!"라고 마트를 뒤집었다. 마트 매니저는 사과를 하고, 사과를 하고도 마음이 석연치 않아 다시 사과하기 위해 그 집에 찾아갔는데! 아버지가 "나도 몰랐군요. 우리 딸이 출산 예정일이 8월이라네요. 사과는 제가 해야겠군요!'라고 했단다. 사실을 알게 된 딸이 아빠 몰래 관련 용품들을 검색해봤을 거고, 아빠보다도 인터넷이 먼저 알아차리고 모든 걸 준비하고 있었다.


이걸 기술의 발전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내 사생활을 보호하자면 아무 데도 접속하지 말고 아무것도 검색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하면 광고는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나오는 광고는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광고 시간에 다른 일을 해도 되는 일이고, 내가 관심 없는 물건들도 많이 나오니까. 하지만 이건 무시할 수가 없다. 나를 타겟한 광고는 해당 페이지에 있는 정보들과 싸우며 주의를 끌려고 안달이다.




무의식 중에 내 주의력과 몰입을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다.



광고가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하고자 하는 일은 단 하나다! 관심 끌기!

매슈 크로퍼드의 책 <당신의 머리 밖 세상: 몰입을 방해하는 시대에 대한 보고서>에서 내 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키워드를 발견했다. 책은 'attentional economy'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아직 한국에는 널리 소개되지 않은 개념으로 '주의력 경제' 혹은 '주의 경제'로 번역할 수 있다. 완전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간단히 설명하자면, 주의력을 일종의 유한한 재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주의를 끄는 방식으로 경제가 움직인다는 거다. 쉽게 말하면 광고와 매체가 자신에게 집중하도록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문제는 '재화'라고 표현할 수 있는 주의력은 무한하지 않다.


주류 심리학에서는 주의력을 '유한한' 자원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우리는 주의력이라는 자원을 스스로를 위해 동원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이 자원에 걸맞은 정치경제학, 즉 현대 인지 환경이 독특하게 침해되는 현상을 설명할 학문도 없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을 수립하기 위해 나는 주의력 공공재 (attentional commons)라는 개념을 도입하고자 한다.
매슈 크로퍼드, <당신의 머리 밖 세상: 몰입을 방해하는 시대에 대한 보고서> 22쪽.


주의력은 공공재이니 내가 대가를 지불하고 내 주의력을 구매하도록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방해받지 않는 고요함이 사치재가 되었다. 매슈 크로퍼드는 공항 라운지 사례를 예로 든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고요함이 사치재로 공급되지 않던가. 샤를 드골 공항 비즈니스석 라운지에서는 이따금 스푼이 찻잔에 부딪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벽에는 광고가 없으며 텔레비전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 이 공간이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보다 이 고요함 때문이다. (중략) 라운지 바깥은 여느 때처럼 소란하다. 우리가 주의력의 상업화를 허용했으므로, 주의력을 회복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23쪽)


나처럼 공항 라운지를 안 가본 사람도 있을 테니 좀 친근한 예를 들면, 광고를 게시하여 돈을 버는 무료 어플을 사례로 들 수 있다. 이런 무료 어플은 광고를 없애고 싶으면 돈을 지불하라고 한다. 그러니까 엄연히 말하면 나는 무료로 어플을 산 게 아니라 내 주의력을 대가로 어플을 구매한 거다. 광고를 보지 않고 온전히 어플을 이용하고자 하는 소비자는 사실 어플을 구매한다기보다는 돈을 주고 내 주의력을 끌고 있던 광고를 없앰으로써 다시 내 주의력을 사 오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여전히 어플을 미리 체험해보고 광고를 없애는 대가로 돈을 지불하는 게 무엇이 나쁘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거면 왜 어플은 일주일 무료 체험 기간을 제시하지 않고 광고를 다는 걸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주의력의 상업화를 허용하고 있다.

매슈 크로퍼드가 광고에 휩싸인 세상을 '주의력'이라는 단어로 풀어내는 걸 보고 나는 왜 이런 현상이 단순히 귀찮은 걸 넘어서 불편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나는 산만한 환경에서도 상대적으로 주의력이 높은 편이다. 고통스럽지만 자연스럽게 주의력과 몰입을 사용하는 법을 익혀왔다. 그런데 나는 단순히 주변 환경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몰입을 높이지 않는다. 내 주의력을 방해하려는 환경과 기본적으로 부딪쳐보고 자의에 따라 몰입을 선택한다. 사람, 물건으로 인한 산만함에는 익숙하다. 같은 공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고 내가 선택하여 옆자리에 둔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의력을 사용하는 건 익숙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알아차리고 눈앞에 들이미는 광고는 그렇지 않다. 백퍼센트 방해물이다. 일상적으로 방해물과 부딪친 뒤에 이를 차단하는 과정이x50번은 생긴 셈이다. 이놈의 광고들이 무슨 자격으로 내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광고로 경제가 굴러가는 이 세상을, 내 정보와 주의력을 빼앗기는 세상을, 단순히 "자본주의란게 그렇지 뭐."라고 치부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매슈 크로퍼드의 지적처럼 정치경제학적인 의미에서, 사회학적 의미에서, 인지심리학적 측면에서 생각해봐야 할 변화다. 우리는 정말로 괘씸한 주의력 도둑을 이대로  것인가!!!!




글. 오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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