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와 물성

#16 만드는 시간

by 힐데와소피
'물질화된 텍스트'로서의 책


얼마 전 힐데가 읽은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이란 책에 이런 말이 나왔다. 책은 '물질화된 텍스트(material text)'다. 이 아닌 글자는 시각적 기호로써딘가에 반드시 적혀야 한다. 인류는 이제껏 점토판에서 시작하여, 파피루스 두루마리, 양피지와 종이, 아이패드와 아마존 킨들에 텍스트를 적거나 담았다.


힐데는 새삼 다양한 그릇에 담겼던 텍스트의 여정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책'의 모양이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적으로 학습된 구조라는 것 역시 놀라웠다. "책이 어디로 갈지 알려면 책의 오랜 실험과 유희의 역사를 겪은 사물로 이해해야 한다"고 저자인 보서크는 말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 표지에 제목과 저자 이름을 쓰는 것, 구두점이 생긴 것, 문자를 띄어쓰게 된 것, 소리내어 읽지 않고 조용히 눈으로 읽게 된 것 등 이 모든 것이 책의 탄생과 확산으로 함께 이뤄진 변화였다.





현재 책의 전형적인 형태라 불리우는 코덱스(codex)가 '읽기'에 변화를 준 것처럼, 오늘날에는 인터넷과 이북이 읽기를 바꾸고 있다. 웹은 책에 대한 거대한 비유이지만, 동시에 코덱스가 지닌 당연한 구조를 없애고 있다. 웹에는 쪽수가 없으며, 페이지는 순차적으로 나열되는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에 따라 정렬된다. 책이 저자와 편집자, 출판자를 통해 만들어져야 했던 과정이 사라지고, 저자 혼자서 온라인으로 출판할 수 있게 됐다. 독자와 저자의 경계가 흐릿해지며 동시에 폭발적으로 정보의 양은 증가했다. 이제 독자는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자신이 필요한 부분만 찾아내어 읽어내길 원한다.


보서크는 책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덜 읽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읽을 뿐이다". 힐데가 보던 책을 마저 잡은 소피는 이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사람들이 이전과 달리 무언가를 읽는다면, 책도 다르게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라고. 그 '다르게'는 무엇일까, 하고. 어쩌면 지난 몇 개월 간 힐데와 소피가 생각하고 구조화한 책의 방식이 그 '다르게'가 무엇인지 탐구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방식은 웹에 더 잘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책이란 물성도 필요했다. 웹이 가지지 못한 집중과 무게를 구현하고 싶었다.






어찌됐든 여전히 책은 '물건'이다. 물성을 가진 무언가를 만드는 것은 굉장히 세세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물건을 만드는 것은 일종의 경험과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다. 힐데와 소피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이 점이었다. 초심자이기에 책을 만들어 본 경험, 훈련이 부족했다. 책의 크기와 글자의 간격, 책의 표지 재질, 표지의 두께, 종이 개수에 이르기까지. 책을 만드려면 사실 이 모든 것 하나 하나를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얼핏 다 똑같아 보여도 이 세상에 어느 하나 똑같은 책은 없다.


소피는 우연히 대학시절부터 출판을 경험했고, 이는 소피가 단순한 독서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출판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소피는 출판사 별로 책을 만드는 방식에 대해서, 요즘 독립출판계에 소위 핫하는 책에 대해서, 그의 주위 친구들보다는 더 관심을 가졌다. 그는 매번 서점에서 책을 이리저리 만지거나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자기 나름대로 책에 대한 3가지 취향을 정리해냈다. 그것은 글자가 책 중간 사이로 말려들어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고, 표지 이미지는 책의 내용을 적당히 암시해줘야 하며, 내지의 여백은 너무 좁지도 그렇다고 너무 넓지 않게 적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피의 북디자인 취향 3가지

글자가 책 사이로 말려 들어가지 않는다 : 가독의 편의성

표지 이미지는 책의 내용을 적당히 암시한다 : 책의 심미성

여백은 너무 좁지도 그렇다고 너무 넓지도 않은 간격을 유지한다 : 재료의 효율적 사용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기준일 뿐이지 현실에서는 매번 다르게 적용할 수 있다. 힐데는 소피의 취향을 직관적으론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인쇄소와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도 '견본'이 필요했다. 힐데와 소피는 틈이 나는 대로 그들의 기준을 만족할 수 있는 견본을 찾았다. 그러다 어느 날 광화문 교보에서 원하는 책을 발견했다. 영국의 모노클(Monocle)이란 잡지사에서 제작한 트래블가이드 시리즈였다.





소피는 이 책을 보자마자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힐데와 소피가 만드려는 책의 여러 조건에 부합하는 책임이 분명했다. 먼저 이 책은 책이 쫙 펴졌다. (소피의 첫번째 취향을 만족한다.) 표지의 재질이 고급스러운면서도 과하지 않다. (두번째 취향을 만족한다.) 페이지수가 140쪽 내외라서 현재 작업중인 텍스트 분량과 비슷한데도 얇게 느껴지지 않는다. (세번째 취향을 만족한다.) 덤으로 책의 판형이 휴대용으로 가지고 다니기에 알맞고, 한손으로 쥐기에도 무리가 없다.


힐데와 소피는 얼마지나지 않아 인쇄소 한 곳과 연락했다. 청년청에 같이 입주한 팀에게 소개 받은 곳이었다. 소개해주면서 하는 말이 담딩자인 Y주임이 젊은데다가, 적극적으로 같이 용지나 재질도 알아봐주고 상담도 잘해준다고 했다. 소피가 그간 만나봤던 인쇄소 아저씨들은 퉁명스럽고 대답도 잘 안 해주었던지라 금방 마음이 동했다. 과연 소개한 말 그대로 Y주임은 전화 통화에서 싹싹하고 명랑했다. 심지어 직접 사무실로 와서 미팅할 수 있다고도 했다.


Y주임과의 첫 미팅에서 힐데와 소피는 당당히 견본 책을 내밀었다. 가타부타 더 할말도 없었다. "이런 식으로 책을 만들고 싶습니다. 딱 이렇게요." Y주임은 책을 찬찬히 살펴보더니 충분히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죠. 내지는 모조지 백색 같고. 양장 두께는 한번 확인해보면 될 것 같고요." 소피는 Y주임에게 아예 책을 가져가시라 했다. "참, 표지의 이 미세한 격자무늬가 맘에 들더라고요." Y주임은 답했다. "레자크 종이에다 색을 입힌 것 같네요." 오, 뭔가 아는 거 같다 이 사람. 힐데와 소피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지었다.



이제 진짜 만드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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